[조선일보] 오대산 실록, 고향으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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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1-08-24 17:46 조회3,001회 댓글0건본문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이 ‘오대산 ‘왕조실록·의궤 박물관’ 앞에서 “이렇게 훌륭한 박물관이 마련됐으니, 이제 오대산 사고본 실록과 의궤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이제 새 집(왕조실록·의궤박물관)도 지었으니, 오대산 사고(史庫)에 300년간 있었던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제가 21세기의 ‘실록수호총섭(總攝)’이라는 각오로 앞장설 생각입니다.”
지난주 강원 평창 오대산 월정사에서 만난 주지 정념 스님은 평소 온화한 태도와 달리 사뭇 심각한 표정이었다. 월정사 경내는 물론 입구 식당가에도 실록·의궤의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 자리로 돌아옴)’를 촉구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지난 6월에는 월정사가 중심이 돼 ‘범도민 환수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앞으로 서명운동 등도 벌일 계획이다.
정념 스님이 말하는 실록과 의궤는 오대산에 보관돼 있다가 일제에 빼앗겼던 유물이다. 오대산 실록은 2006년, 의궤는 2011년 국내로 돌아왔다. 월정사가 주축이 된 민간 환수 운동의 결과다. 그러나 실록·의궤는 지금도 오대산이 아닌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조선 후기 실록과 의궤를 보관했던 오대산 사고.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 중간쯤 깊은 산 속에 위치했다. 단원 김홍도 작품에도 등장하는 유적으로 6.25전쟁 당시 소실된 건물을 1990년대에 복원했다. 월정사가 불교 유물도 아닌 실록에 큰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것은 400년에 걸친 인연 때문이다. 오대산 실록은 일본과 질긴 악연이 있다. 실록이 오대산으로 오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문. 조선 왕조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의 사본을 4부 더 만들어 태백산·묘향산·마니산 그리고 오대산에 분산 보관했다. 1606년 오대산에 사고를 만든 후 월정사 주지는 당연직으로 ‘실록수호총섭’을 맡게 됐고, 실록 경비를 위해 영감사라는 사찰까지 세워 스님들이 돌아가며 실록을 지켰다.
300년을 오대산에서 잘 지내던 실록은 1913년부터 100년 비운(悲運)과 유랑이 시작됐다. 일제가 오대산 실록 788책(冊)을 빼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시작이었다. 동경제대에 보관하던 실록은 10년 후인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이 잿더미가 됐다. 일제는 소실을 면한 27책을 경성제대로 이관했다. 그렇지만 일본엔 오대산 실록 47책이 더 남아있었다. 이 실록은 한일협정 당시 청구권 목록에 오르지 못했다. 이후 국가 대 국가의 청구권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월정사 등 민간이 나서서 환수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실록·의궤가 돌아왔다. 그렇지만 바로 오대산으로 돌아올 것 같던 실록과 의궤는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서울에 있다.
300년을 오대산에서 잘 지내던 실록은 1913년부터 100년 비운(悲運)과 유랑이 시작됐다. 일제가 오대산 실록 788책(冊)을 빼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시작이었다. 동경제대에 보관하던 실록은 10년 후인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이 잿더미가 됐다. 일제는 소실을 면한 27책을 경성제대로 이관했다. 그렇지만 일본엔 오대산 실록 47책이 더 남아있었다. 이 실록은 한일협정 당시 청구권 목록에 오르지 못했다. 이후 국가 대 국가의 청구권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월정사 등 민간이 나서서 환수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실록·의궤가 돌아왔다. 그렇지만 바로 오대산으로 돌아올 것 같던 실록과 의궤는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서울에 있다.
오대산 사고본 성종실록의 일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오대산 ‘왕조실록·의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의궤 영인본(복사본). 일본에서 돌아온 원본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월정사당시 문화재 당국이 내세운 이유는 월정사의 ‘관리 능력 부족’이었다. 실제로 그때는 보관·전시할 마땅한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작년 국비(國費)·도비·군비 등 131억원을 들여 항온 항습 시설 등을 갖춘 ‘왕조실록·의궤박물관’을 신축 개관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월정사가 다시 ‘환수위’를 꾸려 환수 운동을 재점화한 것도 박물관 개관이 계기가 됐다. 정념 스님은 “현재 박물관에는 영인본(影印本·복사본)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는 몸만 있고 영혼이 없는 것으로 사리가 없는 사리탑과 같다”며 “연간 100만명이 찾는 오대산에서 위대한 기록 문화 유산 원본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또 “소유권을 넘겨달라는 것이 아니다. 영구 임대든 어떤 형식이라도 실록과 의궤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월정사는 실록·의궤가 돌아오면 오대산 전체를 불교 문화, 정신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유네스코 ‘복합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도 추진할 계획이다.
월정사 입구 '왕조실록-의궤 박물관' 야경. 왼쪽 앞에 보이는 건물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이며 그 뒤 건물이 실록의궤 박물관. /월정사문화재청은 일단 오대산 실록·의궤의 귀향(歸鄕)에 부정적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실록과 의궤는 국유 문화재이며 현재로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최적 보관 장소라는 입장”이라며 “다만 대여 전시 등 활용 방안은 월정사 측과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대산 ‘왕조실록·의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의궤 영인본(복사본). 일본에서 돌아온 원본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월정사당시 문화재 당국이 내세운 이유는 월정사의 ‘관리 능력 부족’이었다. 실제로 그때는 보관·전시할 마땅한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작년 국비(國費)·도비·군비 등 131억원을 들여 항온 항습 시설 등을 갖춘 ‘왕조실록·의궤박물관’을 신축 개관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월정사가 다시 ‘환수위’를 꾸려 환수 운동을 재점화한 것도 박물관 개관이 계기가 됐다. 정념 스님은 “현재 박물관에는 영인본(影印本·복사본)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는 몸만 있고 영혼이 없는 것으로 사리가 없는 사리탑과 같다”며 “연간 100만명이 찾는 오대산에서 위대한 기록 문화 유산 원본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또 “소유권을 넘겨달라는 것이 아니다. 영구 임대든 어떤 형식이라도 실록과 의궤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월정사는 실록·의궤가 돌아오면 오대산 전체를 불교 문화, 정신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유네스코 ‘복합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도 추진할 계획이다.
월정사 입구 '왕조실록-의궤 박물관' 야경. 왼쪽 앞에 보이는 건물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이며 그 뒤 건물이 실록의궤 박물관. /월정사문화재청은 일단 오대산 실록·의궤의 귀향(歸鄕)에 부정적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실록과 의궤는 국유 문화재이며 현재로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최적 보관 장소라는 입장”이라며 “다만 대여 전시 등 활용 방안은 월정사 측과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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