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성지 오대산 적멸보궁(법보신문)_2012.01.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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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01-30 10:00 조회11,573회 댓글0건본문
자장율사가 사리 봉안…일연 스님 “불법 번창” 극찬
중대사자암서 공양 올리며 365일 염불 끊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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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 스님은 문수성지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엄지를 제외한 오른손 네 손가락 모두 소신공양했다. 서대 염불암에 기거하며 날마다 적멸보궁에서 하루 3000배씩 절을 시작한 지 7일째 되던 날 원력을 세웠다고 한다. 스님은 영원히 번뇌를 벗고 오랜 숙세의 빚을 갚아 불법을 통해 완전한 신심을 결정짓고자 했다. 도종환 시인은 시 ‘단풍 드는 날’에서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고 했다. 아마 스님은 육신을 비롯해 현상에 대한 집착과 번뇌를 버렸을 게다. 하여 촛농을 떨어뜨려 불붙인 손가락은 새벽을 밝히며 가장 아름답게 불탔으리라.
그 절대 신심이 깃든 오대산 적멸보궁을 향했다. 오대산은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르는 8km 이상의 눈 덮인 전나무 숲길을 버스로 지나치니 못내 아쉬움이 일었다. 편리함에 기댄 이기심은 아쉬움을 사치로 퇴색시켰다. 언제부터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다. 애먼 버스에게 속을 풀었다. 상원사에 오르는 입구에 세조가 어의를 걸쳤다는 관상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문수보살이 직접 세조를 목욕시킬 때 세조가 의관을 걸어둔 곳이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악업으로 피부병에 시달리다 여기 어디쯤에서 문수보살에게 등을 맡기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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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를 참배한 뒤 비스듬한 언덕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거쳐 1km 남짓 오르자 중대사자암에 다다랐다. 깎아지른 산비탈과 겨울바람 센 오대산 자연에 순응한 채 처마를 포갰다. 적멸보궁 앞에 조성한 하나의 다층석탑 같았다. 행장을 풀었다. 1050m 높이에 자리한 중대사자암(감원 해량 스님)은 적멸보궁 향각(香閣)이다. 적멸보궁 참배와 공양물을 올리기 위한 스님이나 신도가 머무는 곳이다. 사실 수호암자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 사자암 이름은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영물 사자에서 온 듯했다.
중대사자암서 비로봉 쪽으로 0.6km 더 올라야 적멸보궁이다. 20분 정도 걸린다. 적멸보궁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 흔들림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 궁전이란 뜻이다. 부처님이란 얘기다. 적멸보궁은 비로봉서 흘러내린 산맥들을 병풍으로 두르고 있었다. 이 자리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란다. 아래엔 2개 샘이 있는데 이를 용의 눈 ‘용안수(龍眼水)’라고 불렀다. 실제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목엔 샘이 있었다. 그러나 겨울가뭄으로 샘은 말랐고, 메마른 목은 적시지 못했다.
적멸보궁 뒤엔 1m가 채 되지 않은 비 하나가 서 있었다. 자장율사가 부처님 정골사리를 봉안한 장소라는 증거란다. 사자암 감원 해량 스님은 불뇌보탑(佛腦寶塔)이라고 했다. 5층 마애불탑과 사리를 모신 그릇 형상이 앞뒤로 새겨졌다. 사리는 육바라밀을 닦은 공덕으로 생기거나 계정혜(戒定慧) 수행에 의해 생긴다. 때문에 복전으로 신앙 대상이기도 하다. 적멸보궁 뒤 봉분에 세워진 비는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한암 스님이 찾아내 다시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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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스님은 자장율사가 이곳에 사리를 봉안했다 믿는다. ‘삼국유사’ 오대산 5만 진신조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한 스님에게 부처님 진신사리를 얻었다. 그 스님은 “그대 나라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 문수보살이 언제나 거주하니 친견하라”고 일렀다. 율사는 643년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 진신을 보고자 했으나 사흘 동안 날씨가 어둡고 흐려 못 봤다고 한다.
왜 자장율사는 비로봉 아래 부처님 사리를 모셨을까.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풍수지리가 말을 빌어 “국내 명산 중에도 이곳이 가장 좋은 땅이므로,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라 오대산을 극찬했다. 스님 말마따나 오대산은 문수성지다. 처음 오대산에 오른 범부가 봐도 형세가 범상치 않았다. 특히 오대산은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호령봉, 상왕봉, 동대산, 두로봉 등 5개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 부처님 정골사리가 있어 법신이 충만한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산허리엔 보살들이 현현하는 다섯 ‘대(臺)’가 있다. 오대산을 좌대로 불보살이 깃든 형국이랄까. 동대 관음암에는 1만 관세음보살, 서대 염불암에는 1만 대세지보살, 남대 지장암에는 1만 지장보살, 북대 상두암도 1만 미륵보살이 머문다. 중대사자암은 1만 문수보살이 있으며 주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중대, 동대, 서대, 남대, 북대 보살들이 적멸보궁에 계신 부처님 설법을 듣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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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스님도 오대산에 5만 불보살이 있다고 했다. 보천, 호명 두 태자가 오대산서 수행하면서 동쪽 대 만월산 1만 관음보살 진신, 남쪽 대 기린산 1만 지장보살, 서쪽 대 장령산 1만 대세지보살, 북쪽 대 상왕산 5백 대아라한, 중대 풍로산 또는 지로산엔 비로자나불 수위로 1만 문수보살이 나툰다 했다. 문수보살은 날마다 이른 아침 상원사에서 36종 형상으로 변해 나타난다고도 했다.
직업병이었다. 병적(?)으로 숫자를 더했다. 4만 500불보살은 5만에 한참 부족했다. 적멸보궁도 초라한 행색이었다. 진신사리가 있어 불상은 모시지 않고 법당 안엔 붉은 색 방석만 수미단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초라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신심과 원력이 뒤섞여 들끓고 있었다. 함께 적멸보궁으로 올랐던 노보살은 좌복을 깔고 앉아 석가모니불 정근 속에 가부좌를 틀었다. 범접할 수 없는 고요함은 소리 없는 사자후를 전하는 듯 했다. 가부좌 튼 노보살 뒷모습에 압도당했다. 5만 진신 가운데 9500불보살은 어쩌면 문수성지 오대산 적멸보궁을 찾는 신심들을 일컫는지 모를 일이다. 적멸보궁 계단 위에서 노보살의 발자국을 내려다 봤다. 가지런한 반면 뒤따른 발자국은 어지러웠다. 마음이 중심을 잃은 게다. 한 번 더 노보살 신심에 할 말을 잃었다. 중대사자암으로 발걸음을 옮겨 겨울밤을 났다. 그 날, 밤새 겨울 산바람이 할퀴고 간 오대산은 울어댔다.
다음 날인 1월18일 오전 8시30분, 비구니 스님이 홀로 적멸보궁을 향했다. 바랑에는 사시 마지불공 때 부처님께 공양 올릴 밥을 실었다. 스님은 아침마다 30분 정도 산길을 걸으며 녹음된 법문을 듣는다고 했다. 카메라를 들고 뒤따르자 어색해했다. 스님은 곧 밝게 웃으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적멸보궁에서는 1년 내내 새벽예불과 마지불공, 108 참회기도, 정진기도, 원력기도가 밤 11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스님을 적멸보궁까지 배웅한 뒤 3년째 화주실을 지키고 있는 길상심(60) 보살과 차를 나눠 마셨다. 보살은 적멸보궁을 거쳐 갔던 이들의 얘기를 풀어놨다. 교회 다니던 한 남성은 적멸보궁을 찾은 뒤 용안수 부근과 중대사자암 등지서 급한 일을 보다 뺨을 맞았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얼한 정도로 뺨을 맞은 남성이 이내 감화해 절절하게 기도했다고 한다. 시력이 안 좋은 노보살이 용안수를 지나다 “왜 안 씻고 그냥 지나냐”는 소리에 눈을 씻고 나니 눈이 맑아졌단 소문도 들었다. 올봄, 길상심 보살은 60대 중반 노보살을 만났다. 노보살은 100일 기도하다 소주를 먹었고, 눈이 나빠졌는데 용안수로 씻은 뒤 나았다고 했다. 길상심 보살은 모골이 송연함을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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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 정근하며 100일 기도 중인 혜란 보살은 “마음 중심을 잡는 것”이라고 기도를 설명했다. 기도를 하다보면 가피를 얻기도 하지만 부처님 앞에서 하는 기도는 마음가짐을 다잡게 한다고 했다.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적멸보궁까지 오른 노보살 마음 그 자체가 신심이랬다. 영험을 얻는다면 신심 그 자체인 기도덕이라고 혜란 보살은 말했다. 적멸보궁에는 방학 동안 매일 절을 올리는 중학생도 만났다. 서울에서 온 김민상(16, 우담, 언주중 3) 학생은 보궁에서 올리는 기도시간마다 절을 올렸다. 가족이 모두 화목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중대사자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전 11시가 다 될 무렵,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오대산 전체를 장엄했다. 적멸보궁과 중대사자암 1만 문수보살, 동대 관음암 1만 관세음보살, 서대 염불암 1만 대세지보살, 남대 지장암 1만 지장보살, 북대 상두암 1만 미륵보살이 나툰 듯 순간 새소리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문수성지 오대산 골골마다 기도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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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이 떠올랐다. 경허, 만공, 수월 스님과 함께 선풍을 드날렸던 스님. 스님은 세수 50이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직을 벗어 던지며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촌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일갈하며 오대산에 들었다. 당시 스님은 오대산을 오르며 짚고 왔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사자암 앞에 꽂았다. 지팡이가 뿌리 내려 단풍을 드리우듯 스님은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1951년 좌탈입망으로 입적할 때까지 27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했다.
한암 스님과 일타 스님의 서릿발 같은 구도심과 신심은 어디쯤일까. 오대산 화전민촌에서 동이 트기 전부터 몸을 정갈히 하고 한 톨 한 톨 쌀을 담아 적멸보궁까지 올랐던 노보살들일까. 오대산에 면면히 흐르는 절대 신심은 중대사자암서 마지를 메고 오르던 스님 모습은 아닐까. 문득,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을 차로 내달렸던 자신이 부끄럽다. 삼독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버릴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아름답게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중대사자암 앞 한암 스님 단풍나무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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