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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등장하는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물, ‘우통수’(동아사이언스)201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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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07-18 11:24 조회11,7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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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답사 여정으로 계획한 대로 한반도 중부 이하를 먼저 답사한 후 기세를 몰아 강원도로 향했다. 강원도 첫 답사지로는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얼음골. 이곳을 찾는 것이 다소 어려우므로 내비게이션에 예미초등학교 운치분교를 입력하고 따라가면 운치1리, 3리로 들어가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얼음골은 운치1리 돈니치에 있는데 돈니치란 부드럽고 찰진 진흙땅이라는 뜻이다.

●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얼음골

운치1리로 들어가는 표지판을 지나 몇 백m 가면 자동차 7〜8대가 주차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이곳 바로 좌측에 있는 팻말을 따라가면 1m 정도의 너덜들이 깔려 있는데 이 위로 100m 정도를 올라가면 얼음골이다. 얼음골 앞에는 약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운치리 얼음골은 다른 지역과 차이가 나는 독특한 지형을 갖는다. 해발고도 400m에 위치하면서 남서향이다. 따라서 북서쪽에는 백운산(882.5m)이, 남서쪽에는 724.1m 산, 서쪽에는 곰봉(1014.9m), 북쪽에는 754.2m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음에도 겨울 내내 햇볕이 비춘다. 여름철에도 얼음이 얼어있는 입구까지 햇빛이 들어온다. 밀양 얼음골이 북향이어서 가을부터 봄까지 일사량이 거의 없는 것과 천지차이다.

운치리 얼음골의 모습. 한여름에도 굴 내부에 고드름이 달려있다.

게다가 밀양 얼음골은 너덜 바로 아래에 지하수가 흐르고 있지만 운치리 얼음골의 지하수면(포화수면)은 매우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밀양 얼음골처럼 지하수를 결빙 요인으로 고려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밀양 얼음골을 비롯해 전국 각 지역 얼음골이 서로 다른 환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각 지역마다 결빙이론 이유에 대해서는 전제조건이 다를 수도 있다.

전병일은 운치리 얼음골의 경우 밀양 얼음골을 설명했던 것처럼 단열팽창설, 기화열, 자연대류설, 냉기체류설(2회 참조), 등을 차용하여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운치리는 계곡이 아니라 산등성이에 있고 지하수면이 결빙지점보다 상당히 하부에 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운치리 얼음골에서 겨울철의 기온하강과 여름철의 찬공기 분출 등을 볼 때 자연대류설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밀양 얼음골과는 너무나 다른 부분이 많으므로 앞으로 보다 많은 연구로 정확한 요인이 제시될 것으로 생각된다.

운치리를 나와 30〜40m 폭의 동강줄기를 따라가면 그림 같은 풍광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원래 동강은 영월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했으나 댐건설이 백지화됨에 따라 현재도 아름다운 강변을 보여 주고 있다. 강이 넓어 다리를 놓지 못하고 어부들은 아직도 줄배를 타고 다니는데 얼음골이 아니라도 동강의 매력에 심취하기 바란다.

● 얼음골 원리로 에너지 절약?

한국에 있는 수많은 얼음골은 세계 학자들에게도 궁금증의 대상이다. 특히 일본에서의 관심은 상상 이상이다. 일본 후지TV는 내시경 카메라를 이용해 밀양 얼음골을 촬영했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을 촬영해 얼음골의 얼음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가장 바깥쪽의 얼음은 투명하지 않고 눈이 얼은 듯한 뿌연 형태이고, 다음은 고드름처럼 투명하고 큰 얼음, 가장 안쪽 얼음은 지표면에 물방울이 떨어진 듯한 작은 구 모양을 하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얼음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징적인 조건을 갖춰야만 가능한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산기슭에 너덜이 있다고 해서 어느 곳이나 ‘얼음골’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너덜을 이루는돌이 20~30㎝ 정도 크기이고, 너덜 각도도 약 30〜40도를 유지해야 한다. 돌의 크기가 너무 작으면 너덜의 위아래로 공기의 대류가 일어나기 어렵고, 너무 크면 공기와 돌이 접하는 면적이 커 열전달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너덜을 이루는 길이도 최소한 500m는 되어야 한다. 이에 못 미칠 경우 차거나 뜨거운 공기가 단숨에 채워져 공기의 저장이 불가능하다. 물론 다소 작다고 해도 경사가 작으면 공기가 흘러가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열전달이 충분히 이루어져 얼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급하면 공기가 흘러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얼음이 되기 어렵다.

너덜의 재료가 얼음이 형성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견해도 많다. 밀양 얼음골은 안산암으로 만들어졌다. 안산암 같은 화산암은 용암이 분출되어 급격히 식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입자가 치밀하지 못하고 미세한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다공성의 돌이 된다. 구멍이 많이 때문에 돌이 쌓여 있기 때문에 물이 공기에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너덜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 내용은 워낙 확고한 정설로 받아 들여졌으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어 왔다. 필자는 이 부분에 의문을 가졌다. 과거부터 여러 얼음골을 답사하면서 너덜의 재료가 지역마다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김은일 박사와 필자는 전북 진안군 주천면, 충북 제천시 금수산 얼음골과 전북 진안군 성수면 풍혈․냉천에 있는 암석의 성분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그동안의 정설과는 달랐다. 성분 분석에 의하면 반드시 화산암인 안산암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암석은 화산암보다 깊은 곳에서 비교적 천천히 식어서 만들어지는 반심성암인 반암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흔한 화성암(한국의 암석 중 35%를 차지한다)을 갖고도 조건만 맞게 설계한다면 어느 장소에서나 자연형 냉방시스템을 적용한 얼음골을 조성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도심의 야산을 얼음골의 원리로 이용하여 각 가정에 공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보령의 냉풍욕장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 강원 정선군 북평면 한골(풍혈)

운치리 얼음골을 나와 인근에 있는 정선군 북평면 한골(항골)계곡으로 향한다. 한골계곡은 과거에 강원도 정선에서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계곡, 소위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진 곳이다. 계곡의 길이도 남다르게 길어 끝에 있는 단임 마을까지 거리가 40㎞나 된다. 한골계곡을 흐르는 물은 차고 맑으며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하여 ‘한골(항골)계곡’이라고도 한다.

한골계곡은 내비게이션에 북평초등학교를 입력한 뒤 정선에서 42번 국도를 따라가다 북평초등학교 앞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중간에 폴리텍Ⅲ 정선 캠퍼스가 있고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이곳은 1990년대만 해도 대한석탄공사 나전 광업소가 있어 어느 곳보다 부럽지 않은 자금의 도시였다. 탄광이 호황일 때 탄광에 있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개그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화려한 탄광 마을이 사라지자 한골 계곡은 왁자지껄하던 마을에서 한적한 전원마을로 변신했다.

계곡에 들어서면 너덜 지대의 돌로 만든 돌탑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숫자로만 보면 천불천탑이 있다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의 운주사 못지 않다. 이 많은 탑을 쌓기 시작한 것은 근래인 2000년부터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농한기 때 한두 기씩 쌓은 것인데 탑들의 모습도 가지가지로 불국사의 다보탑은 물론 삐뚤삐뚤하여 금방 넘어질 듯이 보이는 위태로운 탑도, 아이들이 쌓았음직한 작은 탑도 보인다. 보통 정성이 아니고서는 탑을 쌓기 어렵기 때문에 이제는 이곳의 명물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한골계곡 입구에는 주민들이 계곡에서 흘러 내린 돌을 이용해 쌓은 탑이 잔뜩 있다.

이들 탑 쌓기는 원래 야산 기슭에 돌이 흘러내려 처치하기에도 어렵게 되자 이 흉물을 정화시키자는 뜻에서 면장을 지냈던 최종진 씨가 발의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탑 쌓는 방법을 모르므로 처음에는 석공을 초청해 탑 쌓는 방법을 배워 쌓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 정성이 통하여 소위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석탑 주위에 항아리를 엎어 놓고 마을 주민들이 각자 좋아하는 글을 적은 것이다. 읽어보면 그야말로 감동적이어서 모두 읽을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하튼 벽지 중의 벽지였던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개발된 아이디어를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전국 어디에서나 현장에 맞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골계곡은 한국 불교의 간판이라 볼 수 있는 신라의 대국통 자장법사의 발걸음이 배어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자장은 오대산 상원사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후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에 수다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곳은 상원사를 오가는 지름길이 된다. 자장의 명성은 어린아이의 자장가로도 익히 알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이 자장이 국가를 지켜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인 ‘자장. 자장’을 부르며 아이를 재웠다고 한다.

계곡이 길기는 하지만 물레방아가 있는 곳을 들어서기만 하면 찬 기운이 얼굴을 치고, 손끝조차 담그기 겁날 정도로 계곡물이 차다.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열목어나 송어가 살았다고 할 정도로 물이 맑다. 근래에는 이들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인간들이 그들의 삶을 방해하여 어디론가 숨었는지 모른다.

한 여름이라도 두터운 웃옷을 챙겨 입지 않으면 낭패를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지만 한골계곡은 필자를 매우 실망시킨 곳이기도 하다. 계곡을 통제하고 있는 최석규 관리사는 이곳이 풍혈(Air hole)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한다. 계곡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므로 이를 풍혈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현지에서는 풍혈보다는 찰한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계곡 바람이 아닌 진정한 풍혈을 찾는 필자가 단양 군청의 김대순 학예사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선 안에 있는 한 곳을 추천했다.

바로 50여 년 전만해도 한국에서 매우 유명했던 정선읍 회동리에 있는 얼음굴이다. 자연절리동굴이라고도 불리는데 가리왕산자연휴양림 매표소 입구 바로 옆에 있다. 정선문화원에서 발간한 『정선의 옛지명』에는 회동계곡물이 이 굴 앞에서 지하로 스며들어 평창군 미탄면 평안 마을로 솟아나간다고 한다. 삼복더위에도 10분을 참기 어려운 한냉한 빙굴로 여름에 많은 얼음이 생겨 주민들이 따서 먹었다고 한다. 현재는 낙석 등이 우려되어 비공개 중인데 입구에 다가가자 그야말로 한기가 느껴진다. 안전 설비를 철저하게 설치한 후 개방한다면 또 하나의 명물이 정선군에서 태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정선읍 회동리 얼음굴의 모습. 현재는 낙석 위험 때문에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수정암 우통수

정선군에서 냉기를 한껏 체험한 후 한국 제2의 명수로 불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와 상원사의 서쪽에 있는 서대(西臺) 수정암의 우통수(于筒水)로 향한다. 우통수는 조선 때 우중수(牛重水)라고 했다.

월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땅으로 신앙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史庫)가 있다.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8각9층석탑(국보 제48호),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적멸보궁,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이 있으며 인근에 있는 월정사의 말사인 상원사는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제36호),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보물 제793호) 등이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우통수를 답사하면서 월정사와 상원사를 지나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우통수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기우자집>과 권근(1352~1409)의 『양촌집』에서 보인다.

‘우통수가 흘러나오는 곳에 수정암(西臺)이 있다. 초창은 보질도, 효명의 시대라고 하는데 고려 중기까지 많은 수행승 들이 수행하던 곳이다. (중략) 우통수는 한강의 시원이며 관(官)에서 제사한다’

수정암(水精庵)은 영불암 이전의 이름이며 월정사의 ‘정(精)’자가 이 암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통수에 대한 내용은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동국여지승람』의 우통수에 대한 글은 다음과 같다.

‘서대(西臺)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물 빛깔과 맛이 딴 물보다 훌륭하고 다른 물보다 무거워 우통수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이 모인 것이나, 우통물이 복판 줄기가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는 것이 중국에 양자강이 있는 것과 같으며 한강이라는 명칭도 이 때문이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우통수는 한결 같이 경수(輕水)가 아닌 중수(重水)로 한강의 복판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었다. 우통수의 명성이 높다는 것은 물의 빛깔과 맛이 특이하며 변하지 않아 중국 양자강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뜻에서 중냉(中冷)이라 부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3대 명수 중 하나인 우통수를 찾아간다고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우선 우통수가 있는 서대 수정암을 방문하려면 월정사의 출입 허가를 얻어야 한다. 필자는 월정사의 정념(正念)스님, 봉선사 혜문 스님과 함께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일원으로 참여한 인연 덕에 우통수를 방문하겠다고 하자 흔쾌히 승낙해 준다.

우통수로 가는 길 즉 서대 수정암(영불암)으로 가는 길 역시 매우 가팔라 등산 차림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산행 길 곳곳에 ‘국립공원특별사법경찰이 순찰 중이므로 무단 침범하다 적발될 경우 벌금을 물린다’는 팻말이 있어 기를 팍팍 죽인다. 고생 고생해 수정암에 도착하자 흔히 보는 사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인다. 지붕 뿐만 아니라 굴뚝까지도 통나무로 된 너와집이다. 굴뚝은 속이 썩은 나무를 이용했다. 속을 들여다보면 원추모양의 뾰족한 돌기들이 튀어나와 있다. 줄기에서 가지가 자란 흔적이다.

암자라기에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참선 수도하는 스님들을 위한 토굴처로 이용된다. 수정암의 방문을 금지하는 이유다. 참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암자 옆에 있는 옹달샘으로 갔다. 이 물이 바로 우통수다. 평창군에서 세운 우통수 앞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곳은 한수(漢水, 한강)의 발원지로 물빛과 맛이 특이하고 물의 무게 또한 무거워 우통수라 불리며 속리산 삼파수와 충주 달천과 함께 조선 3대 명수로 전해지고 있다. 오대신앙(五臺信仰)을 정착시킨 신라의 보천태자가 수정암에서 수도할 때 이 물을 매일 길어다가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고 한다.’

우통수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성가를 높인다.

‘두 태자(太子)가 산 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므로 형 태자(太子, 보천)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으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보(步)를 가니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태자(太子) 효명(孝明)이 또 암자를 짓고 살면서 각각 부지런히 업(業)을 닦았다.
(중략) 두 태자(太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王位)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네 사람의 장군을 보내서 산에 와서 이들 두 태자(太子)를 맞아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孝明)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어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 노부(鹵簿)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寶川, 보질도)은 울면서 이를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나라를 여러 해 다스렸다‘

위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로 차를 달였다는 기록이며, 형인 보천태자가 왕위를 사양하여 신라왕이 된 효명이 33대 성덕왕(702〜737)이다.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준 보천 태자가 중국으로 건너가 구화산의 지장왕보살이 된 김교각 스님이다. 지장왕보살 김교각은 713년 24세의 나이로 당나라로 건너가 99살로 열반했는데 육신불로 유명하며 중국 불교 4대 성지 중의 하나인 구화산 지장도량을 개창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성덕왕 4년(705), 왕이 백관을 친히 데리고 산에 와 전당(殿堂)을 세우고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당에 모셨다. 또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하여 오랫동안 경비를 대었다. 매 해 봄, 가을마다 창조(倉組) 1백 석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도록 정했고 주변의 땅을 하사했다. 따라서 우통수 뒤편의 대지와 기와 파편은 당시의 유물이다.

서대 수정암의 모습(왼쪽)과 조선 3대 명수 중 두 번째라는 우통수를 설명한 표지석(오른쪽).

불행하게도 우통수의 물은 마셔보지 못했다. 우통수를 덮고 있는 덮개에 시건장치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다소 실망했지만 내려오는 길에 샘물이 있어 이를 한껏 마셨다. 우통수와 다름없지만 필자가 샘물의 맛을 정확하게 평할 수 없어 다시 한 번 아쉬움을 남겼다.

오대산의 우통수는 예로부터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우통수 앞에 있는 표지석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그러나 고 이형석 박사는 이를 단연코 부정한다. 강의 발원지는 강 하구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가장 수량이 많은 물줄기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정해지는 데 한강의 발원지는 우통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검룡소(儉龍沼)이다.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 및 삼척시에 걸쳐 있는 금대봉(金臺峰, 1418m) 기슭에 있는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물골의 물구녕 석간수, 예굼터의 석간수에서 솟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검룡소에서 다시 솟아 나와 514㎞ 한강의 발원지가 된다. 둘레 20여m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룡소는 석회 암반을 뚫고 올라오는 지하수가 하루 5000톤 가량 용출하면서 곧바로 20여m의 폭포를 이루는 장관을 연출한다. 따라서 우통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한강의 발원지는 아니지만 한강의 역사적 발원지로 설명할 수있다.

참고로 월정사 적멸보궁 아래에서 지금도 솟아나는 용안수(龍眼水)도 우통수와 마찬가지로 다른 물과 어울리지 않는 우중수로 알려진다. 한 마디로 빼어난 명수(明水)라는 뜻이다. 한국의 명수 중 은메달인 서대 수정암(영불암)의 우통수를 찾은 것으로 제1차 답사를 마무리한다.(7회에 계속)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mystery123@korea.com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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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기행(1)』, 김재일, 당대, 2000
『국토와지명(3), 땅은 이름으로 말한다』, 김기빈, 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 2004
『이형석의 문화유산 답사기』, 이형석, 홍익재, 2006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 월정사, 2008
『과학삼국유사』, 이종호, 동아시아, 2011
「전설의 고향 얼음골」, 최병준, 경향신문, 1998.08.05
「얼음골 풍혈 피서여행 얼음골은 더 서늘해 이가 덜덜」, 최병준, 경향신문, 1998.08.11
「강원도 정선 북평의 돌탑마을 한골」, 최병준, 경향신문, 1999.10.09.
「강원도 정선군 운치리 얼음골의 여름철 결빙현상에 관한 고찰」, 전병일 외, 2000년도 정기총회 및 봄 학술발표회, 한국환경과학회, 2000
「강원도 정선군 운치리 얼음골의 여름철 결빙현상에 관한 연구」, 전병일, 한국환경과학회지 제11권(제9호), 2002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 서금영, 과학향기, 2006.08.02
「항골계곡, 그곳에선 심장도 얼어붙었다. 강원도 정선」, 강기희, 오마이뉴스, 2007.06.02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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