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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어디에 있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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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1-06-27 10:27 조회3,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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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빼앗겼다 일부 돌려받아 국립고궁박물관서 관리 중인데
월정사쪽, 강원도청 등과 손잡고 실록의궤 환수 범도민 추진위 출범
지역 문화 콘텐츠 브렌드화 위해 국민청원·서명운동·캠페인 나서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사역 안에 자리한 오대산 사고. 1606년 지어져 1913년 일제에 약탈당할 때까지 307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곳이다. 한국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가 1992년 현재의 두 건물이 복원되었다. 주위 담자락엔 개망초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지 3년이 지난 1913년 3월3일은 우리가 잘 모르는 또 다른 국치일이다. 108년 전 이날, 겨울의 냉기가 여전히 감돌던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서 한국 기록유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비극이 벌어졌다.

 

 조선을 대표하는 역사 기록물 <조선왕조실록>을 임진왜란 직후인 1606년부터 보관해온 오대산 사고에 이날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인 관원과 평창군의 일본인 서무주임 히구치, 고용원 조병선 등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실록이 담긴 상자들을 통째로 털어갔다. 300여년간 사고를 지키던 인근 월정사 승려들은 절 역사를 기록한 <오대산사적>에 이런 사실을 적는 것 말고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오대산 사고의 선원보전. 왕실 관련 문서를 보관했던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오대산 사고의 사각(史閣).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의 핵심 건물이다.

총독부 일행은 실록 더미를 강릉군 주문진항으로 가져가 일본행 배에 실다.

 

일본에 닿은 실록은 곧장 도쿄 혼고에 있는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연구실로 옮겨졌다. 이를 보고 미소 짓는 교수가 있었다. 한민족을 침략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왕세자 시절 역사 스승이자 일제 식민사학의 태두였던 시라토리 구라키치(1865~1942)였다.

조선사 연구의 필수불가결한 자료인 실록을 반드시 일본으로 가져와 연구와 왕세자 교육에 활용해야겠다는 그의 욕망은 적중했다.

 

직접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데라우치 초대 총독에게 약탈과 기증을 청탁했고, 이후 자행된 약탈은 오대산 사고와 월정사의 근대 수난사가 시작되는 기점이 됐다.

 

 

 

시라토리는 약탈 이듬해 <동양시보> 학술지에 실은 조선여행담이란 글에서 실록은 비장해서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현재는 총독부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태이므로 총독에게 기증을 몇차례 부탁했으며, 실록 모두를 도쿄제국대학으로 발송해줄 것을 요청해 191311월까지 도쿄에 모두 도착했다고 의기양양하게 적었다.

 

광무 4년인 1900년 춘추관에서 오대산 사고를 지키고 관리하는 능참봉 자리에 이종창이란 이를 임명한 문서.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이 한 수집가에게서 입수한 유물이다.
 

 

월정사의 역사를 기록한 <오대산사적>에 기록된 1913년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약탈 상황. ‘대정 3년(1913년) 데라우치 조선총독의 지시로 총독부 관원과 평창군 서무주임 히구치,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절에 머무르면서 사고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항으로 운반해 일본 도쿄대학으로 가져갔다’는 내용을 적었다.

하지만 억지 기증된 788책의 대부분인 714책은 10년 뒤인 1923년 도쿄 대지진으로 잿더미 속에 사라졌다. 외부에 대출된 덕분에 살아남은 74책 가운데 27책은 1932년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로 돌아왔고, 나머지는 93년이 지난 2006년에야 월정사 등이 주동이 된 불교계 환수추진위 활동으로 고국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당시 불교계는 월정사 쪽에 실록을 안치하겠다고 주장했으나, 정부실록이 왕실 문화유산이며 절의 관리 능력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2016년 관리 주체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확정했다.

실록 약탈 뒤 사고는 해방 이후까지 방치됐다가 1951년 1·4후퇴 당시 국군이 월정사와 함께 소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사고 터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웠던 의병장 사명당의 수행처였다. 왜구가 저지른 전란으로 건립됐다가 왜구의 후예에게 약탈당해 버려졌고, 우리나라 군에 의해 불살라진 운명이 기구하다. 1992년 복원된 사고를 22일 찾아가보니 전각 내부는 박쥐들 서식처가 돼 있었고, 주위엔 개망초꽃만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의궤의 한스러운 수난사를 뒤로한 채, 환수된 실록을 원래 보관 장소인 오대산으로 돌려보내야 할지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월정사 쪽이 강원도청과 소설가 조정래 등 문화계 인사들과 손잡고 지난 16일 실록의궤 환수 범도민 추진위원회(이하 환수위)를 출범시키면서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실록의궤의 오대산 사고 환수와 지역 대표 문화 콘텐츠 브랜드화를 위한 국민청원과 서명운동, 캠페인 등을 벌이겠다고 한다.

월정사 사역 초입에 있는 왕조실록·의궤 박물관 내부의 전시장. 한가운데 오대산 사고 전각들의 모형을 배치해놓았다.

새롭게 환수론을 불 지피기 시작한 절과 강원도 쪽의 명분은 두가지다. 
정부가 나서지 않은 환수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월정사 등 불교종단이 도맡아 성사시켰다는 것과, 2006년 오대산에서 열린 환수고유제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관리 능력과 시설이 되면 돌려주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2019년 최신 시설과 관리 인력을 갖춘 실록의궤 박물관을 완공해 기본 여건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청과 학계 일부 인사들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실록은 본질적으로 국가 왕실 사료의 성격을 지니고, 오대산 사고도 국가 직영 위탁 기관이기 때문이다. 불교계가 지역 연고를 내세워 자기네 성보처럼 환지본처 정신을 내세워 환수하려는 것은 지나치며, 국가 박물관 귀속이 확정된 만큼 환수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이건희 기증 컬렉션 미술관 건립을 둘러싼 지자체 간 경쟁이 격화하면서 문화분권 자체가 한국 사회의 쟁점으로 부각된 상황이 새 변수로 떠올랐다. 환수 압박에 직면한 문화재 당국은 어떻게 소통하며 대안을 내놓을까. 사실상 방치된 오대산 사고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착잡한 감회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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