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화성]길 위에서 놀다(dongA.com)201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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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09-13 09:28 조회10,306회 댓글0건본문
[광화문에서/김화성]길 위에서 놀다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가을 길은 어딜 걸어도 참 좋다.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에 가서 온종일 어슬렁거린다. 껑충 큰 전나무 틈새로 말간 햇살이 비켜 든다. 모시 바람이 “솨아∼솨아∼” 숲을 흔든다. 맨발로 걸어본다. 말랑말랑 땅기운이 스며든다. 짜릿짜릿 온몸이 자지러진다. 눈부신 달밤엔 느릿느릿 소걸음으로 숲 속을 서성인다. 별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머릿속에 박힌다.
나는 걷는다. 틈만 나면 걷는다. 건들건들 걷는다. 허위허위 걷는다. 살금살금 걷는다. 미끄러지듯 걷는다. 성큼성큼 걷는다. 신발을 슬슬 끌며 걷는다. 터벅터벅 걷는다. 걷는 데 ‘바른 자세’가 어디 있을쏘냐. 까치처럼 총총 걸어본다. 씨암탉같이 아기작아기작 걸어본다.
슬며시 소 웃음이 나온다. 에라, 내친김에 뒤뚱뒤뚱 오리걸음 걷는다. 옆으로 슬금슬금 게걸음을 걷는다. 뒷걸음질로 가재걸음 걷는다. 엉덩이 실룩샐룩 아진걸음 걷는다. 비실비실 배착걸음도 걸어본다. 오호, 어느 걸음짓이든 다 좋구나.
길은 해방이다. 무한도량이다. 발길 닿는 대로 훠이훠이 걸어야 제맛이다. 사람이 가면 그게 곧 길이다. 만들어진 길은 ‘굳은 길, 헌 길’일 뿐이다. 새가 어디 공중에 길을 낸 적 있는가. 새는 늘 허공에 새 빗금 그으며 날아간다.
길은 혼자 걸어야 자유다. 휘발성이다. 둘이 걸으면 점액질이 된다. 끈적끈적 서로를 옭아맨다. 셋이 되면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진다. 서로 티격태격 부딪친다. 엄마와 딸이라고 예외가 없다. 서로 뽀로통한 얼굴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간다. 부부도 비슷하다. 거의 반쯤은 줄기차게 싸운다. 친구끼리도 우정은커녕 되레 서먹서먹해진다.
그렇다. 길 위에선 그 어떤 관계도 굴레다. 자유는 뼈 시린 외로움 속에 있다. 혼자 가면 무섭다고? 그거야 ‘따로 또 같이’ 걸으면 그만이다. 나그네들끼리 울력걸음 하면 된다. 서로 보일 정도로 ‘저만치 혼자’ 가는 게 그것이다.
길은 다 똑같다. 논두렁길, 밭둑길, 고갯길, 둘레길, 올레길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이면 다인가. ‘내면의 소리니 뭐니’ 웬 눈물바람 호들갑인가. 기를 쓰고 도장 받아가며 ‘전 구간 완보’에 목맬 것도 없다. 그 쇠심줄 같은 집착이라니. 길 위에선 그저 놀면 된다. 노는 자가 으뜸이다.
어슬렁어슬렁 걸어본다. 슬슬 배회해본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해찰하며 걸어본다. 이 골목, 저 골목, 뒷짐 지고 걸어본다. 달팽이처럼 걸어본다. 지렁이처럼 엉금엉금 기듯이 걷는다. 노루처럼 겅중겅중 걷는다. ‘빠릿빠릿’ 진둥걸음 걷는다. 앙감질로 깽깽이걸음 걷는다. 햐아! 정말 좋다. 그 어떤 걸음새도 다 좋다. 아, 어린 가을 9월, 어딜 걸어도 참 좋다!
‘빠르고 높고 넓고 편한 길을 버리고/일부러 숲길 고갯길 강길 들길 옛길을 에둘러/아주 천천히 걷고 또 걸어서 그대에게 갑니다//잠시라도 산정의 바벨탑 같은 욕망을 내려놓고/백두대간종주니 지리산종주의 헉헉/앞사람 발뒤꿈치만 보이는 길 잠시 버리고/어머니 시집 올 때 울며 넘던 시오리 고갯길/장보러 간 아버지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숲길/…그 잊혀진 길들을 걷고 걸어 그대에게 갑니다’ ―이원규 ‘지리산둘레길’에서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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