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찬스님 월정사 중창 오대산 법통 계승(불교신문 27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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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01-27 09:23 조회12,196회 댓글0건본문
월정사.김광식 엮음/ 오대산 월정사 |
오대산 중창주 만화희찬(萬化喜燦)스님의 역사 찾기가 책으로 빛을 봤다. 근현대 대한불교조계종의 100년 역사를 가장 깊숙이 안고 있는 월정사의 산증인들을 통한 역사 조망은 그만큼 역동적이다. 초대종정 한암스님을 시봉했었고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월정사 복구, 그리고 은사 탄허스님의 곁을 지켰던 희찬스님은 그 중심에 서있었다. 책은 그래서 부제가 ‘만화 희찬선사의 수행과 가르침’이다.
탄허스님의 친필 속에 희찬스님의 흔적은 역력하다. 조중훈 송덕비에 탄허스님은 “만화 희찬은 본래 수좌인데 법당을 낙성시킨 것은 희찬”이라 썼다. 인보스님은 탄허스님이 희찬스님에 대해 평가가 일관됐던 점을 회고했다. “탄허스님은 ‘중대에서도 같이 살았지만, 희찬이는 꿈에 만져보아도 중이라’고 늘상 말했다.”
그 험난한 한국전쟁 당시 모두 피난에 올랐을 때 희찬스님은 한암스님 시봉을 위해 상원사를 끝까지 지켰다. 월정사 정화의 주역인 월탄스님의 회고도 있다. 친일 총무원장 출신의 당시 대처승 주지인 이종옥과 맞섰던 비구승 주지 탄허스님이 숫적으로 너무 열세여서, 월탄스님과 희찬스님은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숙의했다.
정성과 부지런함의 수행증표
스님과 거사 40여 명 회고담
대웅전·천왕문 등 준공
회주로 사부대중 인도
결국 동국대에서 비구.비구니 교육이 진행되던 현장에 찾아가 스님들을 단체로 월정사로 이끌어냈고, 이는 결과적으로 월정사 정화의 결산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한 열흘 동안 월정사에 더 있으면서 탄허스님 특강도 듣고 그랬다. 그 후로는 대처승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대처승들이 물러갔고 월정사 정화는 완전히 끝났다.”
책은 희찬스님과 인연을 나누었던 40여 스님과 거사들의 증언과 회고로 엮었다. 현해스님은 ‘한암-탄허-희찬스님’으로 이어지는 법통에 대해 “마땅히 그렇게 봐야 한다. 탄허스님의 강맥은 각성.무비.통광스님에게 갔다. 그러나 스님은 오대산의 가풍을 지키고 계승하면서 월정사를 복구하여 오대산의 전통을 구현한 그 자체가 법을 이은 것이다”고 말했다.
희찬스님의 출가 전 속가 딸인 묘행스님의 증언도 새롭다. 희찬스님의 출가 배경과 집안의 내력, 평안도 출신으로 월남한 가족사에 얽힌 잔잔한 기록이 찬찬히 펼쳐진다.
권속 관계가 없는 무이스님의 평가를 보자. “하여간 정성이 대단하였다. 부지런함은 형제 모두가 닮았다. 덕운처사라고 동생이 절에 있었는데 일을 열심히 해서 월정사 보물이라고 했다.” 전소됐던 월정사 복원의 주역인 희찬스님의 재정 타개책은 난승스님이 회고했다. “지금 방산굴 근처 터밭에 배추를 심어서 팔았다. 우엉도 심었고 밥장사도 참 많이 했다. 관광객 상대의 밥장사는 1960년대 월정사를 대표하는 상표였다.”
각수스님은 “희찬스님은 아주 겸손하였고 특히 탄허스님을 잘 모시고 남달리 잘했다. 한마디로 희찬스님은 오대산 복원을 위해 태어나신 스님이라 보면 된다.”
탄허대종사의 환력(還曆)을 기념하는 1974년 1월12일 사진. 가운데가 탄허스님, 왼쪽 옆으로 보경스님 성암스님 수증스님 시은스님, 오른쪽으로 만화 희찬스님 희섭스님 정무(혜덕)스님 인보스님 등이다. |
금강선원장 혜거스님의 증언도 있다. “희찬스님은 심성이 고왔다. 극한 상황에서도 대처승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걸물이고 배포도 컸던 대처승 대표 이와운스님도 희찬스님에게는 정말 깍듯하게 했다. 인간성에 승복한 것이었다.”
혜거스님은 책에서 월정사 법당 불사의 과정 및 탄허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던 과정 등을 소상히 밝힌다. 이어 오대산을 떠나 화계사 숭산스님과의 인연 및 청담스님을 잠깐 시봉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증언들은 희찬스님에 대해 ‘오대산의 법통’을 밝혀준다. 더불어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 최근까지의 오대산의 역사가 생생하게 들려진다. 대웅전 중창 목재 벌채로 4차례 입건 구속된 파란만장한 현대불교사가 스님의 이력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희찬스님은 조실채 방산굴을 비롯해 대웅전 보장각 천왕문 서당 용금루 해행당 동당(설선당) 등을 준공시켰다. 스님은 5.6대 중앙종회 의원을 거쳐 월정사 회주로 추대됐으며 1983년 상원사에서 입적했다.
중창불사 당시 산감으로 있었던 장길환 거사는 불법적인 체제 속에 법당 완공 과정을 설명하며 “직원이 가면 쉽게 못나와서 모든 것을 희찬스님이 내가 책임을 진다는 식으로 한 것이다. 스님이 잡혀가도 우리들은 그냥 일을 했다”고 책 <오대산의 버팀목>에서 말했다.
[불교신문 2784호/ 1월18일자]
김종찬 기자 kimjc00@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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