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번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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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10-19 08:00 조회11,190회 댓글0건본문
상원사 동종의 젖꼭지가 떨어진 이유는?
[문수성지 오대산의 단풍 구경 ②] 오대산 상원사12.10.17 09:39
최종 업데이트 12.10.17 09:39 이상기(skrie)▲ 상원사로 내려가는 사람들 | |
ⓒ 이상기 |
북대 미륵암을 나온 우리는 잘 닦인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진다. 우리처럼 상원사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원사에서 북대와 두로령 쪽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오대산에는 붉은 단풍나무보다는 노란색으로 물드는 활엽수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화려하다기 보다는 은근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미륵암에서 상원사 탐방지원센터까지는 5㎞로 1시간 15분이 걸린다.
상원사 탐방지원센터에 이르니 오후 2시 50분이다. 그런데 이곳은 사람과 차들로 북적인다. 차량이 올라올 수 있는 한계점이서인지 차도 많고 사람도 많다. 그래도 차보다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아 걸어 올라온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편하게 가을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차를 타고 올라오고,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가을 단풍을 제대로 즐기려는 사람들은 걸어 올라온다. 그리고 우리처럼 오대산의 가을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오대산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든다.
▲ 상원사 표지석 | |
ⓒ 이상기 |
상원사 탐방지원센터에서 상원사로 오르는 길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새로 난 도로를 따라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옛길로 접어든다. 옛길이라야 300m 정도의 짧은 길이다. 입구에 적멸보궁 문수성지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고, 문수성지는 문수동자가 현현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길 주변에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까치박달나무가 많이 보인다. 높이가 15m나 되는 큰키나무로 나무껍질은 상수리나무 비슷하다.
상원사 옛길에서 만난 한암스님
이들 길을 따라 올라가니 상원사에 주석했던 큰스님들의 승탑과 탑비가 세워져 있다. 왼쪽에 조계종 종정을 지낸 한암(漢巖)스님, 가운데 탄허(呑虛)스님, 오른쪽에 만화(萬化)스님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승탑 양식이 재미있다. 한암스님의 것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방식이다. 아래위가 긴 구형 아래로 앙련과 복련을 새긴 받침돌을 세우고, 위로는 8각형의 덮개돌을 얹었다. 탄허스님의 것은 고려초 원공국사탑의 양식을 따랐다. 이에 비해 만화스님의 것은 고려초 홍법국사 실상탑의 변형으로 보인다. 이들 스님은 상원사 월정사와 평생을 같이한 선지식이다.
▲ 한암대종사탑과 탑비 | |
ⓒ 이상기 |
한암(1876-1951)대종사는 강원도 화천 출신으로 189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행름(行凜)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리고 신계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수심결(修心訣)>을 읽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899년에는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다시 개심(開心)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5년에는 통도사 내원선원의 방장이 되어 참선대중을 지도하였다. 스님은 이후 건봉사와 봉은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25년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오대산문을 나오지 않았다.
▲ 좌탈입망의 한암스님 | |
ⓒ 월정사 |
최근 <불교평론>에 윤창화 민족사 대표가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이라는 글을 쓴 바 있다. 그 글에 따르면 경허의 법제자 한암(漢巖)이 1931년 만공의 소청으로 <경허화상행장>을 썼다. 한암은 경허의 법과 교화(法化) 그리고 행리를 열거한 다음 "선도 끝까지 이르렀고(철저했고) 악도 끝까지 이르렀다(可謂 善到底 惡到底)"고 적고 있다. 여기서 선(善)이란 그의 법화(法化)와 깨달은 경지가 특별했음을 말하는 것이고, 악(惡)이란 바로 여색과 음주식육 등을 즐겨했던 점을 가리킨다고 윤창화 대표는 설명한다.
이 글로 인해 <불교평론>은 폐간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윤창화 대표는 그동안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한암선사의 서간문 고찰>과 같은 논문을 써 한암의 삶과 선사상을 알려는데 힘써 왔다. 한암스님은 1936년 대한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이 되었고 3대 종정까지 지냈다. 1950년 전쟁 중 상원사가 불에 탈 위기에 처하자 이것을 몸으로 막아 상원사를 지킬 수 있었다. 스님은 1951년 상원사에서 앉아서 열반(坐脫入亡)하니 세수 75세, 법랍 54세였다.
교육과 역경 사업에 평생을 바친 탄허스님
▲ 탄허대종사탑과 탑비 | |
ⓒ 이상기 |
탄허(1913-1983)대종사는 전라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할아버지와 이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29년에는 충남 보령으로 옮겨 이극종(李克宗) 선생으로부터 사서삼경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한다. 1932년부터 그는 노자와 장자 등 도교사상을 공부했고, 1934년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해 한암스님을 은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36년 6월에는 선교(禪敎) 겸수(兼修)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상원사에 승려 연합수련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탄허스님은 한암스님의 증명(證明) 하에 <금강경(金剛經)> <기신론(起信論)><범망경(梵網經)> 등을 강의했다.
이후 한암스님이 입적하는 1951년까지 15년 동안 탄허스님은 <전등록(傳燈錄)> <선문염송(禪門拈頌)> <보조법어(普照法語)> <육조단경(六祖壇經)> <영가집(永嘉集> 등 중요경전과 선어록(禪語錄)을 가르쳤다. 1955년에는 월정사 조실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월정사에 오대산 수도원을 설치했다. 오대산 수도원은 불교와 사회 전반에 걸쳐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교육결사였다. 그러므로 승속을 불문하고 원생을 모집 5년 동안 교육시켰다.
▲ 탄허스님 | |
ⓒ www.tanheo.com |
1956년부터는 또한 불경 번역에 착수,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등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1967년 3월 드디어 6만2500여 장에 달하는 <신화엄경합론> 번역을 완료했으며, 1975년 8월 <신화엄경합론>이 화엄학연구소에서 간행되었다. 탄허스님은 이후에도 사교(四敎) 번역에 착수하여 1980년 번역을 마쳤다. 사교란 <능엄경(楞嚴經)>,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기신론(起信論)>을 말한다. 그리고 탄허스님은 열반하는 1983년까지 <도덕경(道德經)> 현토 역주에 매진하다 세수 71세 법랍 49세로 입적하였다.
탄허스님은 워낙 한문 실력이 뛰어나 불경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스님들의 비문과 사리탑비명을 지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한암대종사 부도비명, 금오(金烏)대종사 부도비명, 청담(靑潭)대종사 사리탑비명 등이 있다. 또한 사적비문, 송덕비문도 여럿 남겼다. 대표적인 것으로 월정사 법당중창 대시주송덕 비문, 청룡사(靑龍寺) 중창 사적비기 등이 있다. 현재 상원사 부도전에는 탄허스님의 부도탑과 탑비가 있는데, 1986년 4월 24일에 세워졌다.
전설로 남은 세조와 문수동자의 만남
▲ 상원사 문수전 | |
ⓒ 이상기 |
우리는 부도전을 지나 상원사에 이른다.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문수성지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산서성(山西省) 오대산의 문수신앙을 이곳 오대산에 전파했다. 그러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사람은 자장율사가 아닌 조선시대 세조대왕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62년 11월 5일 세조대왕이 상원사에 거동한다. 그리고 그때 관음보살이 현현하는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이후 상원사는 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1465년 2월 20일에는 신미대사가 상원사를 구축(構築)하고, 조정에서는 철(鐵)과 쌀(米) 그리고 포(布)를 내린다. 1466년 윤 3월 17일에는 세조가 문무백관을 이끌고 다시 상원사에 거동한다. 이때 어가(御駕)를 따른 대신으로는 영의정 신숙주, 좌의정 구치관, 상당군 한명회, 동지중추부사 김수온, 호조판서 노사신 등이 있다. 당시 상원사에는 김수온의 형인 신미(信眉)대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 문수동자상 | |
ⓒ 이상기 |
이상이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상원사에는 세조와 관련된 또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문수보살이 동자승으로 현현해 세조의 등을 밀어주었다는 전설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상원사 동종과 관련된 이야기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는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이후 몸에 종기가 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세조는 이것을 고치기 위해 명산대찰을 순례하다 오대산까지 오게 되었다. 세조는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던 중 물 맑은 계곡에서 홀로 몸에 씻게 되었다.
그때 마침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 속에서 놀고 있는 게 보였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서 등을 밀어달라고 말하면서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그 아이도 "임금께서는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문수보살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 상원사 청풍루에서 바라 본 단풍 | |
ⓒ 이상기 |
얼마 후 신비롭게도 세조를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기억을 더듬어 화공에게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상원사에 모시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동자상 안의 복장유물에서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문수동자상은 세조가 아닌 세조의 딸에 의해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젖꼭지가 떨어져 나간 상원사 동종 이야기
상원사 동종 역시 1465년 상원사를 새로 짓는 일과 관련이 있다. 조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1466년 상원사를 낙성했지만 종은 만들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종을 수배해 그 중 가장 아름답고 소리가 좋은 것을 상원사로 보내도록 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경상도 안동의 역사를 기록한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안동의 어느 절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이 있었다고 한다. 이 종은 나중에 안동도호부의 남문 누각으로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상원사 동종: 오른쪽 위, 젖꼭지가 떨어진 자국이 보인다. | |
ⓒ 이상기 |
우여곡절 끝에 안동 남문의 종이 선택되어 상원사로 가게 되었고 한다. 그래서 이 종이 죽령을 넘어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1469년(예종 1) 이 종이 죽령을 넘다가 아마 마차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모양이다. 이때 종의 상단부에 있는 종유(鐘乳: 종의 젖꼭지) 하나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이 일을 맡은 관리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재치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낸 것 같다. "고개를 넘다가 쉬는데 종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이 종이 옛 고장 안동을 떠나기 싫어서인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종의 젖꼭지를 하나 떼어 안동으로 보내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자 종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다. 상원사 종을 보면 사방으로 9개씩 모두 36개 종유가 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중 하나의 종유가 떨어지고 없다. <영가지>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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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사로 내려가는 사람들 | |
ⓒ 이상기 |
북대 미륵암을 나온 우리는 잘 닦인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진다. 우리처럼 상원사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원사에서 북대와 두로령 쪽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오대산에는 붉은 단풍나무보다는 노란색으로 물드는 활엽수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화려하다기 보다는 은근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미륵암에서 상원사 탐방지원센터까지는 5㎞로 1시간 15분이 걸린다.
상원사 탐방지원센터에 이르니 오후 2시 50분이다. 그런데 이곳은 사람과 차들로 북적인다. 차량이 올라올 수 있는 한계점이서인지 차도 많고 사람도 많다. 그래도 차보다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아 걸어 올라온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편하게 가을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차를 타고 올라오고,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가을 단풍을 제대로 즐기려는 사람들은 걸어 올라온다. 그리고 우리처럼 오대산의 가을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오대산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든다.
▲ 상원사 표지석 | |
ⓒ 이상기 |
상원사 탐방지원센터에서 상원사로 오르는 길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새로 난 도로를 따라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옛길로 접어든다. 옛길이라야 300m 정도의 짧은 길이다. 입구에 적멸보궁 문수성지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고, 문수성지는 문수동자가 현현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길 주변에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까치박달나무가 많이 보인다. 높이가 15m나 되는 큰키나무로 나무껍질은 상수리나무 비슷하다.
상원사 옛길에서 만난 한암스님
이들 길을 따라 올라가니 상원사에 주석했던 큰스님들의 승탑과 탑비가 세워져 있다. 왼쪽에 조계종 종정을 지낸 한암(漢巖)스님, 가운데 탄허(呑虛)스님, 오른쪽에 만화(萬化)스님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승탑 양식이 재미있다. 한암스님의 것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방식이다. 아래위가 긴 구형 아래로 앙련과 복련을 새긴 받침돌을 세우고, 위로는 8각형의 덮개돌을 얹었다. 탄허스님의 것은 고려초 원공국사탑의 양식을 따랐다. 이에 비해 만화스님의 것은 고려초 홍법국사 실상탑의 변형으로 보인다. 이들 스님은 상원사 월정사와 평생을 같이한 선지식이다.
▲ 한암대종사탑과 탑비 | |
ⓒ 이상기 |
한암(1876-1951)대종사는 강원도 화천 출신으로 189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행름(行凜)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리고 신계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수심결(修心訣)>을 읽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899년에는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다시 개심(開心)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5년에는 통도사 내원선원의 방장이 되어 참선대중을 지도하였다. 스님은 이후 건봉사와 봉은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25년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오대산문을 나오지 않았다.
▲ 좌탈입망의 한암스님 | |
ⓒ 월정사 |
최근 <불교평론>에 윤창화 민족사 대표가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이라는 글을 쓴 바 있다. 그 글에 따르면 경허의 법제자 한암(漢巖)이 1931년 만공의 소청으로 <경허화상행장>을 썼다. 한암은 경허의 법과 교화(法化) 그리고 행리를 열거한 다음 "선도 끝까지 이르렀고(철저했고) 악도 끝까지 이르렀다(可謂 善到底 惡到底)"고 적고 있다. 여기서 선(善)이란 그의 법화(法化)와 깨달은 경지가 특별했음을 말하는 것이고, 악(惡)이란 바로 여색과 음주식육 등을 즐겨했던 점을 가리킨다고 윤창화 대표는 설명한다.
이 글로 인해 <불교평론>은 폐간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윤창화 대표는 그동안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한암선사의 서간문 고찰>과 같은 논문을 써 한암의 삶과 선사상을 알려는데 힘써 왔다. 한암스님은 1936년 대한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이 되었고 3대 종정까지 지냈다. 1950년 전쟁 중 상원사가 불에 탈 위기에 처하자 이것을 몸으로 막아 상원사를 지킬 수 있었다. 스님은 1951년 상원사에서 앉아서 열반(坐脫入亡)하니 세수 75세, 법랍 54세였다.
교육과 역경 사업에 평생을 바친 탄허스님
▲ 탄허대종사탑과 탑비 | |
ⓒ 이상기 |
탄허(1913-1983)대종사는 전라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할아버지와 이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29년에는 충남 보령으로 옮겨 이극종(李克宗) 선생으로부터 사서삼경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한다. 1932년부터 그는 노자와 장자 등 도교사상을 공부했고, 1934년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해 한암스님을 은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36년 6월에는 선교(禪敎) 겸수(兼修)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상원사에 승려 연합수련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탄허스님은 한암스님의 증명(證明) 하에 <금강경(金剛經)> <기신론(起信論)><범망경(梵網經)> 등을 강의했다.
이후 한암스님이 입적하는 1951년까지 15년 동안 탄허스님은 <전등록(傳燈錄)> <선문염송(禪門拈頌)> <보조법어(普照法語)> <육조단경(六祖壇經)> <영가집(永嘉集> 등 중요경전과 선어록(禪語錄)을 가르쳤다. 1955년에는 월정사 조실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월정사에 오대산 수도원을 설치했다. 오대산 수도원은 불교와 사회 전반에 걸쳐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교육결사였다. 그러므로 승속을 불문하고 원생을 모집 5년 동안 교육시켰다.
▲ 탄허스님 | |
ⓒ www.tanheo.com |
1956년부터는 또한 불경 번역에 착수,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등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1967년 3월 드디어 6만2500여 장에 달하는 <신화엄경합론> 번역을 완료했으며, 1975년 8월 <신화엄경합론>이 화엄학연구소에서 간행되었다. 탄허스님은 이후에도 사교(四敎) 번역에 착수하여 1980년 번역을 마쳤다. 사교란 <능엄경(楞嚴經)>,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기신론(起信論)>을 말한다. 그리고 탄허스님은 열반하는 1983년까지 <도덕경(道德經)> 현토 역주에 매진하다 세수 71세 법랍 49세로 입적하였다.
탄허스님은 워낙 한문 실력이 뛰어나 불경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스님들의 비문과 사리탑비명을 지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한암대종사 부도비명, 금오(金烏)대종사 부도비명, 청담(靑潭)대종사 사리탑비명 등이 있다. 또한 사적비문, 송덕비문도 여럿 남겼다. 대표적인 것으로 월정사 법당중창 대시주송덕 비문, 청룡사(靑龍寺) 중창 사적비기 등이 있다. 현재 상원사 부도전에는 탄허스님의 부도탑과 탑비가 있는데, 1986년 4월 24일에 세워졌다.
전설로 남은 세조와 문수동자의 만남
▲ 상원사 문수전 | |
ⓒ 이상기 |
우리는 부도전을 지나 상원사에 이른다.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문수성지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산서성(山西省) 오대산의 문수신앙을 이곳 오대산에 전파했다. 그러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사람은 자장율사가 아닌 조선시대 세조대왕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62년 11월 5일 세조대왕이 상원사에 거동한다. 그리고 그때 관음보살이 현현하는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이후 상원사는 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1465년 2월 20일에는 신미대사가 상원사를 구축(構築)하고, 조정에서는 철(鐵)과 쌀(米) 그리고 포(布)를 내린다. 1466년 윤 3월 17일에는 세조가 문무백관을 이끌고 다시 상원사에 거동한다. 이때 어가(御駕)를 따른 대신으로는 영의정 신숙주, 좌의정 구치관, 상당군 한명회, 동지중추부사 김수온, 호조판서 노사신 등이 있다. 당시 상원사에는 김수온의 형인 신미(信眉)대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 문수동자상 | |
ⓒ 이상기 |
이상이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상원사에는 세조와 관련된 또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문수보살이 동자승으로 현현해 세조의 등을 밀어주었다는 전설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상원사 동종과 관련된 이야기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는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이후 몸에 종기가 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세조는 이것을 고치기 위해 명산대찰을 순례하다 오대산까지 오게 되었다. 세조는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던 중 물 맑은 계곡에서 홀로 몸에 씻게 되었다.
그때 마침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 속에서 놀고 있는 게 보였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서 등을 밀어달라고 말하면서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그 아이도 "임금께서는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문수보살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 상원사 청풍루에서 바라 본 단풍 | |
ⓒ 이상기 |
얼마 후 신비롭게도 세조를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기억을 더듬어 화공에게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상원사에 모시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동자상 안의 복장유물에서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문수동자상은 세조가 아닌 세조의 딸에 의해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젖꼭지가 떨어져 나간 상원사 동종 이야기
상원사 동종 역시 1465년 상원사를 새로 짓는 일과 관련이 있다. 조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1466년 상원사를 낙성했지만 종은 만들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종을 수배해 그 중 가장 아름답고 소리가 좋은 것을 상원사로 보내도록 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경상도 안동의 역사를 기록한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안동의 어느 절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이 있었다고 한다. 이 종은 나중에 안동도호부의 남문 누각으로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상원사 동종: 오른쪽 위, 젖꼭지가 떨어진 자국이 보인다. | |
ⓒ 이상기 |
우여곡절 끝에 안동 남문의 종이 선택되어 상원사로 가게 되었고 한다. 그래서 이 종이 죽령을 넘어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1469년(예종 1) 이 종이 죽령을 넘다가 아마 마차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모양이다. 이때 종의 상단부에 있는 종유(鐘乳: 종의 젖꼭지) 하나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이 일을 맡은 관리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재치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낸 것 같다. "고개를 넘다가 쉬는데 종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이 종이 옛 고장 안동을 떠나기 싫어서인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종의 젖꼭지를 하나 떼어 안동으로 보내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자 종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다. 상원사 종을 보면 사방으로 9개씩 모두 36개 종유가 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중 하나의 종유가 떨어지고 없다. <영가지>의 이야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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