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漢岩)선사 일화(경제풍월)201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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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11-29 09:23 조회10,830회 댓글0건본문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한암(漢岩)선사 일화
글/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
(寧爲千古藏踵鶴 不學三春巧鸚語)
한암선사(漢岩禪師) 중원(重遠)이 1925년 봉은사 조실 자리를 버리고 오대산으로 들어가면서 남긴 말이다. 그 뒤 한암선사는 세수 75세, 법랍 54세가 되던 1951년 3월 21일에 입적할 때까지 오대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대산에 한 번 들어간 뒤 다시는 산문 밖으로 나서지 않았던 한암선사, 오대산에서 입적하기로 작정하고 27년간 오대산을 지켰던 학과 같이 고고했던 한암선사,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더 이상 생사의 경계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한 한암선사였기에 미움이 미움을 낳고 피가 피를 부르던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상원사(上院寺) 법당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6.25때 월정사 법당지킨 이야기
6·25전쟁 당시 오대산에는 1,000여 명의 대중과 1,600여 명의 산판 근로자가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정신없이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때 후퇴하던 국군은 오대산 내의 월정사(月精寺) 등 여러 사찰과 암자와 민가가 적군에게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모두 소각하기로 했다.
소각명령을 받은 젊은 장교가 한밤중에 군인들을 이끌고 상원사로 올라와 그런 뜻을 한암선사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은 한암선사가 장교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이른 뒤 가사와 장삼을 갈아입고는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불상 앞에 합장한 채 좌정하더니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불을 질러도 좋소이다.”
“아니, 뭐라고요?”
“이제 불을 지르란 말이외다.”
“스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한암선사가 간곡한 목소리로 장교를 타일렀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나는 부처님의 부하나 마찬가지란 말이외다. 그대가 장군의 명령에 따라야 하듯이 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명령에 따를 뿐이외다!”
한암선사의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던 장교는 부하들에게 법당의 문짝을 뜯어내라고 하여 그것만 불태우고 그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여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의 모든 사암이 잿더미로 변해버려도 상원사 법당만은 소실을 면할 수 있었다.
한암선사는 고종 13년(1876년) 3월 27일에 강원도 화천에서 온양 방씨(溫陽方氏) 기순(箕淳)과 선산 길씨(善山吉氏) 부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중원. 그가 출가한 것은 22세가 되던 1897년이었다. 집을 떠난 중원은 금강산 장안사에서 금월(錦月) 행름대사(行凜大師)를 은사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한암이란 법명을 받았다.
한암은 24세 때인 1899년 경북 성주 청암사에서 운명적으로 경허선사(鏡虛禪師)를 만나게 된다. 꺼져가던 한국불교의 맥을 살린 길 위의 큰스님 경허선사가 대중을 모아 놓고 설법이나 강론을 할 때 한암이 뛰어난 경지를 자주 보였으므로 스승의 칭찬을 받았다.
한암은 29세 때인 1904년 봄 해인사에서 스승 경허선사와 작별하고, 그 이듬해에 통도사 내원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이후 5년 동안 젊은 납자(衲子)들을 지도했다.
평북 맹산에서 군불지피다가 대각
나중에 한암은 제자들을 흩어버리고 길을 떠났다. 그의 발길이 멈춘 곳은 속가 부조(父祖)의 고향인 평안북도 맹산군 애전면 풍림리였다. 그는 이곳 우두암에서 홀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암흑 속에서 갑자기 한 줄기 광명을 보듯이 눈앞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한암의 대각오도(大覺吾道)의 순간이었다.
한암선사는 오대산에서 두문불출하면서도 이런저런 일화를 많이 남겼다. 1948년 6월 30일에 선사는 조선불교 제2대 교정(敎正)으로 추대되었지만, 산문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1950년 6·25동란이 터지자 선사는 목숨을 걸고 상원사를 소각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냈고, 그 이듬해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3월 21일 법상에 앉은 채 입적했다.
한암선사의 빼어난 제자로서 스승의 뜻을 이어 현대불교 중흥에 평생을 바친 김탄허(金呑虛) 스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탄허는 이미 젊은 나이에 유학(儒學)의 진수를 터득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까지 섭렵했지만 늘 진리에 목말라 했다. 그러다가 오대산에 방한암 선사라는 도인이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탄허는 3년 동안 한암선사와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불법의 이치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대산으로 찾아가 한암선사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탄허는 이미 혼인하여 두 자녀를 둔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다.
탄허는 스승이 열반한 뒤 월정사 조실을 맡아 특유의 오대산 종풍(宗風)을 일으키는 한편, 쉴 새 없는 역경사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중생제도에 나섰다. 탄허는 오대산 수도원을 창설한데 이어 동국대학교 선원 원장, 동국대학교 재단이사, 조계종 중앙역경연수원장, 동국역경원 증의위원, 화엄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며 포교·역경과 더불어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탄허 스님은 화엄학에 정통한 고승이었을 뿐 아니라, ‘주역’에도 통달하여 많은 예언을 했고, 또 ‘부처님이 계시다면’ 같은 예언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탄허 스님은 1983년 6월 5일에 오대산 방산굴에서 세수 71세, 법랍 47세로 입적했다.
세조가 두 차례 문수보살 친견
고려 말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은 ‘오대상원사승당기’라는 기록에 따르면,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제자라는 영로암(英露庵)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빈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했다’고 한다. 이렇게 재건된 상원사는 조선왕조로 접어들어 세조(世祖)가 이곳에서 두 차례나 이적(異蹟)을 체험, 유명해지게 된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수많은 충신을 죽이고 조카인 단종(端宗)을 내쫓은 뒤 왕좌를 차지한 세조였지만, 뒷날 불교에 귀의하여 자신의 죄상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그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오대산을 찾았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병이 나았으며, 상원사를 참배하던 중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1984년에 발견된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유물 가운데 세조의 딸 의숙공주(義塾公主)가 이 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이 나왔는데, 높이 98cm의 이 문수동자상은 국보 2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조성되었으며, 현재 국보 36호이다. 이 종은 에밀레종으로 더 잘 알려진 성덕대왕신종보다 45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이다.
일주문에서 월정사 경내에 이르는 길은 하늘로 곧게 쭉쭉 뻗은 전나무숲길이다.
오대산의 불사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선덕여왕 12년(643년)에 당나라 유학을 마친 뒤,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시고 돌아와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1563m) 밑에 이를 봉안하고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창건한 것이 시초였다고 전한다.
자장율사는 그 2년 뒤 동대 만월산 아래에 월정사를 창건하고 경내에 팔각구층석탑을 세워 그 안에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그 뒤 월정사는 조선 철종 7년(1856년)에 중창했지만, 6·25전쟁으로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 대부분은 전쟁 이후 재건한 것이다.
월정사에서 첫손 꼽히는 불교문화재는 적광전 앞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팔각구층석탑으로 현재 국보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정사중건사적기’의 기록에는 자장율사가 월정사를 창건할 때 세웠다고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으로는 고려시대 양식이라고 한다. 이 탑 앞에는 오른쪽 무릎은 꿇고 왼쪽 무릎은 세운 채 두 손을 가슴 앞에 끌어당긴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높이 1.5m의 이 석조보살좌상은 보물 1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문가들은 이 또한 고려시대 양식이라고 한다.
월정사는 팔각구층석탑을 중심으로 무량수전·심검당·삼성각·조사당·진영당·설선당(동당)·대강당(서당)·범종루·용금루(상설전시장)·보장각(성보박물관)·금강루 등이 벌여 서 있는데, 현재의 월정사는 1959년에 탄허 스님의 제자인 만화당(萬化堂) 희찬(喜讚)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대웅전인 적광전을 중건한데 이어 일주문·사천왕문·용금루·진영각·방산굴 등을 중건하여 역사 깊은 대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한 것이다.
상원사는 월정사에서 오대산 안쪽으로 8.5km를 더 들어가야 한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문수도량인 상원사로 올라가는 들머리에는 세조가 상원사에 참배하러 오면서 목욕을 하려고 옷을 벗어 걸었다는 관대걸이가 있고, 한참 더 걸어 올라가면 상원사가 올려다 보이는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 세 개의 부도가 보인다.
맨 왼쪽 것은 한암선사의 부도와 부도비요, 가운데는 탄허화상의 부도와 부도비요, 오른쪽 끝의 것은 만화화상의 부도와 부도비이다. 열반에 들어서도 이들 법제자 3대는 한 가족처럼 나란히 누워서 찾아오는 불자들을 반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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