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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옥 교수의 한국선 이야기] 15. 우여곡절 끝 출가해 한암 선풍 떨쳐 (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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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2-08-14 11:58 조회2,4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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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보문 선사의 구도 수행 3

금강산 마하연서 출가하지 못해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 문하 출가
난암과 함께 한암선풍 널리 떨쳐

7. 마하연을 떠나다

보문은 금강산 마하연에 도착한 뒤로 산 아래 본사인 장안사로부터 쌀을 얻어 지고 오는 일을 도맡았다. 오르막길이었기에 중간에 몇 번 쉬어야 했고 그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석우(石友, 1875~1958)의 상좌로서 마하연의 원주 노릇을 하고 있던 우봉(愚鳳, 1898~1953)이 그걸 보아두었다가 꾸짖었다. 보문은 그 꾸지람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바로 담배를 끊었다.

다시 발심한 보문은 정식 출가를 하기로 결심했다. 마하연 선방의 조실인 석우를 은사로 하고 싶었다. 보문이 석우 슬하로 출가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우봉은 석우에게 보문의 흡연 사실을 알리면서 보문을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문은 우봉의 꾸중을 듣고 난 뒤로는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 석우도 보문을 안 좋게 보지는 않았다. 보문이 월정사에서 사미계를 받을 때 계사가 되어 주었고 세월이 흐른 뒤 보문이 입적하자 보문을 그리워하면서 “보문 스님 같은 스님은 그 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분은 우리 종단의 사표”라고 격찬을 했던 것이다. 그런 석우가 보문을 상좌로 받아주지 않았으니, 우봉이 얼마나 강하게 보문을 밀어냈을지 짐작하게 된다.

우봉이 보문을 경계하고 질투했다고 증언한 분들도 있다. 출가 승려인 우봉이 여덟 살이나 어린 보문을 경계하고 질투했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필자는 큰스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승가 스님들 사이의 은밀한 관계의 이야기를 적잖이 들어왔다. 물론 서로 칭찬해주고 장점을 내세워주는 관계도 있었지만, 경쟁이나 질투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았다. 그 시기에 우봉도 그와 유사한 마음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우봉이 모든 사람에 대해 다 그러하지 않았으니 보문의 어떤 부분이 우봉을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보문은 사진 찍기를 기피하여 단 한 장의 초상 사진만 남겼다. 팔공산 삼성삼 토굴에 거처할 무렵 탁발 등의 이유로 대구 시내로 내려오면 주로 시내 서봉사에서 머물렀다. 서봉사 가까이에 있었던 미8군의 미군이 삿갓 쓴 보문의 모습에서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아 억지로 사진을 찍어주었다고 한다. 그 사진이 보문의 인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보문을 직접 만나 본 분들도 대체로 그 외모에 대하여 비슷한 증언을 해준다.

보문은 키가 크고 마른 몸이었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도업을 이루고자 음식을 받아야 한다’는 오관게(五觀偈)의 가르침을 완전히 실천한 모습이었다.

사람의 눈매는 날카로우면 자비롭지 않고 자비로우면 날카로울 수 없다. 보문의 눈매는 날카로우면서도 자비로웠으니 다들 그 눈매가 형형하다고 한다. 사람의 음성은 우렁차면 맑지 않고 맑으면 우렁찰 수 없다. 보문의 음성은 우렁차면서도 맑았으니 다들 그 음성이 청아하다고 한다. 그 형형한 눈매를 한 번 보고 그 청아한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들어 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매료되어 이끌리게 되었다. 부산과 대구의 시장통으로 탁발을 나가면 상인들은 물론 수많은 거지들까지도 몰려들었다. 보문의 염불 소리에 반한 속리산 호랑이가 춤을 추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쳤고, 그 염불을 듣고 해탈한 사람도 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황산덕 교수의 부인이 그 흉흉한 부산 피난 시절에 보문을 만나 일생의 신도가 된 것도 범일동 시장에서 탁발하는 보문의 모습과 염불 소리에서 비롯했다.

그런 외모와 음성을 가진 보문이었기에 입만 벙긋해도, 아니 그냥 잠자코 있어도 그 존재 자체가 두드러져 보였다. 거기다 보문은 한학과 신학문을 함께 공부한 인텔리로 한산시(寒山詩) 등 중국 도인의 오도송을 읊고 다녔다. 능엄주를 3일 만에 외우고 <범망경>을 일주일 만에 외우는 탁월한 기억력도 가졌다. 상대방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는가에 따라 이런 보문의 모습이 가져다준 결과는 달랐다. 많은 경우는 보문의 모습에서 위안을 받고 흠모하게 되었다. 혹은 위축되어 제압당했다. 그리고 더 많은 경우는 열등감을 느끼고는 질투했다. 금강산 깊은 산골 마하연에서 석우의 맏상좌로서 기반을 닦아가고 있던 우봉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보문이 담배 하나 끊지 못하는 의지박약을 문제 삼았지만, 속마음에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우봉은 보문이 은사의 문하로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 맏상좌인 자기 자리가 흔들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보문의 구도 수행의 길에는 이렇게 겉모습이나 상(相)에 집착하거나 끄달리는 중생의 마음 씀씀이가 개입해서 작동했고 마침내 보문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거듭된 스토리 구조로서의 ‘자기서사’를 따진다면, 보문은 타자가 자기를 질투하고 배척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버티며 겨루기보다는 그냥 스스로 떠나가기를 거듭했던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에서는 탄허(呑虛, 1913~1983)가 그 타자 노릇을 했다. 1947년 희양산 봉암사에서는 성철(性徹, 1912~1993)과 향곡(香谷, 1912~1978)이 그 노릇을 했다. 우봉도 다시 개입했다. 봉암사 결사에는 우봉이 ‘사찰운영의 전책임’을 지고 동참했고 보문은 ‘10년간 장경 수호’를 책임지고 합류했다. 이때 보문은 우봉과의 ‘사소한 충돌’(성철의 회고록)로 법주사 복천암으로 떠나게 되었다. 마하연에서의 배척과 떠남이 봉암사에서 재현된 것이다.


마하연에서 출가하지 못한 보문 스님은 고송 스님의 인도를 받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사진은 오대산 상원사의 옛 모습.

8. 난암과 보문

마하연에서 출가하지 못한 보문은 고송(古松, 1906~2011)의 인도를 받아 오대산 상원사로 가서 한암(漢巖, 1876∼1951)을 뵈었다. 한암은 보문의 여윈 몸을 걱정했다. 약한 몸으로 수행 생활을 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그러자 고송은 “그리 허술한 사람은 아니니 이름이라도 걸어 주십시오”라며 거두어주길 재차 부탁했다.

보문이 한암의 문하로 출가하는 과정은 이렇게 명료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 세간과 출세간은 간명하기보다 기구하고 복잡하게 엮어진다는 진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탄허(呑虛)는 1959년 은사 한암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 “스님(한암)의 법을 얻은 제자가 몇 있는데 오직 보문(普門)과 난암(暖庵)만이 지행(志行)이 초절(超絶)하여 자못 종풍(宗風)을 떨쳤다. 보문은 불행히도 일찍이 별세했다.”

탄허는 자신은 한암의 종풍을 받들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보문과 난암(暖庵, 1893~1983)만이 지행이 뛰어나 한암의 선풍을 떨쳤다고 알렸다. 보문과 함께 난암을 거론한 것이다. 난암은 속명이 유종묵(柳宗?)으로 역시 간단치 않은 삶의 여정을 밟아간 분이다.

난암은 26세 때 3.1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를 유랑했다. 독립운동과 관련되었으리라 짐작한다. 1929년 조선으로 돌아와 불영사에서 출가했다. 그 뒤 한암에게 건당(建幢)을 하였다. 그러다 1935년경 일본 교토 임제학원으로 가서 불교철학을 공부했다. 난암은 재일불교학생회 회장을 맡아서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는 대구사범학교 항일비밀결사 조직 무우원(無憂園)을 주도했던 조형길이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센소사(淺草寺) 불교학원에 진학하여 항일 동지를 규합한 사례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난암은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쿄의 국평사(國平寺), 오오사카의 통국사(統國寺) 등을 관리하거나 개원하여 재일조선인의 신행 장소로 삼았고, 일제강점기 때 이국에서 원통하게 죽은 분들의 혼령을 위로하고 그 유골을 모시어 민족이 통일되는 날을 기다렸다. 조총련과 연계되었기에 남한보다는 북한과 더 가까웠다고도 한다.

난암이 1920년경 만주로 갔다가 1929년 불영사로 출가하여서 1930년경 상원사로 와서 1935년까지 머물며 수행했다면, 보문은 1932년 대구로 왔다가 1935년 부산항만으로 갔고 1936년 상원사로 와서 수행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난암과 보문의 동선은 겹쳐지지 않는다. 한암의 선풍을 드날린 두 제자는 서로 모르는 사이로서 한암의 선풍을 이어간 셈이 된다.

그러나 도문(道文, 1935~ )은 난암과 보문이 직접 만났거나 연결되어 함께 중요한 활동을 했다고 증언한다. 잠시 도문의 가족사와 도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도문의 선조는 삼대에 걸친 용성(龍城, 1864~1940)의 후원자이고 도반이었다. 용성은 3.1운동에 동참했다가 옥고를 치른 뒤 포교당인 대각사를 열어 대중을 이끈 실천적 선승이었다. 도문의 부친 임철호는 용성의 재가 상좌이며 독립투사였다. 임철호가 투옥됐을 때 용성은 12차례나 면회를 갔다. 용성은 임철호가 자식을 낳으면 자신의 법을 이은 동헌(東軒, 1896~1983) 문하로 출가시키라며 도문(道文)이라는 법호를 미리 지어주었다. 동헌과 도문은 진보적 승려인 용성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했으니, ‘용성-동헌-도문’ 그리고 법륜으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진보적 도맥이 형성되었다. 이 도맥에 의해 보문과 난암의 관계가 포착되고 증언된 것이다.

동헌이 용성으로부터 듣고 스스로 견문하기도 하여 도문에게 전한 ‘난암-보문’의 사연은 이러하다. 보문은 대구지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이 무렵 대구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의 거점이었고 부산과 김천 지역에서도 동조의 기운이 있었다.

그 뒤 보문이 여러 곳을 거쳐서 결국 오대산 한암 문하로 출가한 것은, 먼저 한암의 상좌가 되어 있던 난암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다른 사람은 모르고 용성과 동헌 그리고 도문만이 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난암과 보문은 대구에서 함께, 혹은 떨어져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다가 그 시대의 가장 아픈 곳들을 두루 거쳐서 마침내 오대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한암 선풍을 드날렸다는 것이다.

▶한줄요약

보문 스님은 우여곡절 끝에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 문하에서 출가해 난암 스님과 함께 한암 스님의 선풍을 드날린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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