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己未)년인데 기미(幾微)가 보인다”(불교닷컴)201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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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2-24 12:38 조회8,737회 댓글0건본문
“기미(己未)년인데 기미(幾微)가 보인다” | ||||||||
월정사 부주지 원행 스님이 회고하는 탄허 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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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모든 이들이 글을 쓰고 판단하고 비판과 해석에 직접 참여함으로서 역사가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아마도 글을 쓰는 일은 그런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 1979년(기미년) 10월 26일의 사건은 매우 다층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그날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사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이 임명됐다. 1979년 기미년은 탄허 큰스님의 회갑년이기도 했다. 정초에 문도와 신도들은 큰스님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약간의 모금을 했다. 그것을 아신 큰스님께서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꾸중하며 그 돈 전액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보낼 것을 지시하셨다. 기념축하연은 평상시 음식으로 대신하고 큰스님께 시국에 대한 법문을 청했다. 당시 시국은 참담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유신체제에 대해 크게 저항했던 때였다. 주장자를 들고 법상에 오르신 큰스님께서는 “금년이 기미년인데 기미가 보인다” 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참으로 짧고 간단명료한 법문이었다. 이 법문을 경청한 문도와 신도들은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몇 번인가 큰스님께 그 뜻을 여쭸지만 “그래서 너는 월정사 멍청이다”라는 꾸중만 들었다. 큰스님은 일체 함구하시고 <화엄경> 역경 사업에만 전념했다. 평소 큰스님께서는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가 도(道)의 경지”라 하셨고, 영막영어부지(靈莫靈於不知)라 해 “신령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신령한 것”이라 하셨으며, “도인道人의 경지는 언어와 문자가 끊어진 경계”라 하셨다. 1979년 들어서 ‘백두진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 등을 겪으며, 각종 시국사건에대해 강경대응해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체포·연행·연금 등이 잇달았다. 더욱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국회에서 변칙으로 통과시키며 정세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학생 5000여 명은 부산시청 앞에 집결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0월 17일 저녁에는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가 지속적으로 확산됐다.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계엄군에 의해 많은 이들이 연행됐다. 하지만 시위는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마산 쪽으로 확산돼 갔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500여 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그리고 10월 26일, 서울의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다. 10월 27일부터 많은 문도와 신도들이 큰스님을 찾아와 법문을 청했다. 그들 대부분이 연초에 큰스님께서 기미가 보인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 사건을 예견하신 것 아니냐고 놀라워했다. 큰스님께선 역시 함구하신 채 내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라”고 말씀하셨다. 정승화 씨는 평소 자주 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은 “당신은 우유부단해. 본문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약속할 수 있어?”하는 식으로 다그치듯 하셨다. 정승화 씨는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저 “예!” 하고 대답하곤 했다. 이미 육군참모총장까지 된 사람인데 우유부단하다니. 곁에 있던 나도 스님의 말씀이 얼핏 이해되지 않았다. 큰스님 말씀에 따라 내가 공관으로 전화를 걸어보고 집으로도 걸어보았으나 전화는 불통이었다. 큰스님께선 다시 나더러 서울로 가서 정승화를 직접 만나고 오라고 하셨다. 전하는 말씀은 간단했다. 오대산에 한 번 다녀가든지 아니면 전화를 한 번 하라는 것이었다. 급히 서울의 육군참모총장 공관까지 갔으나 공관은 군인들이 새까맣게 에워싸고 있었다. 공관 입구에서 길을 막는 군인을 향해 나는 통사정을 했다. “참모총장께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오대산 탄허 큰스님의 전갈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웬 미친 중인가 하는 표정으로 사뭇 위협을 하며 내쫓았을 뿐이다.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도 가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오대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침 큰스님께선 찾아온 신도에게 법문을 하고 계셨다. “1919년 기미년을 기억하느냐, 당시 3·1운동이 일어났다.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민중들이 주체가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다. 기미년은 양의 해인데 양은 순진무구한 민초를 뜻하지만 이 양에게 뿔이 두 개가 있다. 양은 뿔이 물체에 닿으면 죽음을 무릅쓰고 항쟁하는 속성이 있다. 민중들이 억압과 탄압에 못 견뎌 봉기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이를테면 기위친정이다. ” 대충 이런 요지의 말씀이었다.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지시로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국장이던 허삼수 대령은 대통령의 재가도 없는 상태에서 무장한 병력을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하였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총으로 위협 당하며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정승화 참모총장 측근이던 한 군법사가 스님을 방문했다. 정승화 씨가 감옥에 있으면서 공부를 하고 싶으니 스님께서 강설하신 <화엄경>을 보내주십사, 하는 요청이었다. 스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내 책을 읽을 자격이 없소. 나와 한 약속을 어찌하여 지키지 못했느냐고 묻더라고 전하시오. 그는 이미 실기(失機)했소.” 모두는 어리둥절했다. 스님과 정승화 씨는 어떤 약속을 했던 것일까? 10·26 이후의 혼란기에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씨가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면 그때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정승화 씨는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군인의 본분을 잃고 그 자신의 야욕 때문이었는지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기회를 놓쳐버렸음에 분명하다. 기미년에 기미가 있었으나 또 다른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기미는 또 긴 세월 유보되고 말았다. 또 5·18 광주민주항쟁에서 민중의 엄청난 피흘림을 부르고 말았다. 모든 꽃들이 저마다 제 빛깔로 피어나 만화방창할 때가 화엄의 세계다. 모두가 자기 본분을 알고 거기에 충실할 때, 화엄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 큰스님께서 정승화 씨와 했다는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어쩌면 정승화 씨 본인도 스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는 무슨 약속인가 우리처럼 어리둥절했을지 모른다. 뜻이 깊이 통하는 사람끼리 약속도 할 수 있는 법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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