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로 경전 해석…“화엄경 번역 후 자신감 생겨”(현대불교)201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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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8-26 09:18 조회8,587회 댓글0건본문
선지로 경전 해석…“화엄경 번역 후 자신감 생겨” | ||||||
방산굴의 無影樹 〈27〉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송찬우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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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책 없어 〈화엄경〉도 빌려 권속 늘리려는 ‘전강’ 풍습 거부 宗旨 없으면 글자만 새기는 죽은 학문 장점만 보고 단점을 말하지 않아 -어떻게 해서 탄허 스님과 인연이 되었나요? 제 나이 스물한 살 때인가 동국대에서 스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때(1971년 경) 탄허 스님께서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계셔서, 1주일에 한 번씩 강의를 하러 오시더라구요. 근데, 오셔서 강의하실 때에 책은 안 들고 오시고, 분필 하나만 들고서 유불선 삼교의 원전을 전부 외워서 강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강의를 처음 보고서는 저는 너무나 놀랐어요. 그래 나는 저런 사람이 다 있구나, 얼마나 공부를 하면 저리 될까를 생각하였어요. 그때부터 스님은 나의 흠모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탄허 스님의 유묵은 유명한데요, 결혼 기념으로 병풍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노스님(탄허)은 남들이 글씨를 써 달라고 하는 것을 귀찮아하셨습니다. 글씨를 쓰려면 먹을 제대로 갈아야 하는데, 스님은 먹 가는 시간을 아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먹을 갈지 않고, 먹물을 사다가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유묵은 힘차고 독특한 글씨이지만, 간혹 글씨가 탁하고 묵색이 좋지 않은 것이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화선지 종이도 아깝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책을 얼마나 가지고 계셨나요?
또 탄허 스님은 당신의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그러셨어요. 일제시대, 상원사에서 공부하실 때에도 화엄경이 없었대요. 그래서 고암 스님의 책을 빌려서 하셨는데, 10년에 걸쳐서 번역을 완성하여 출판하시고 나서, 고암 스님에게 보답하시는 차원에서 화엄경 한 질을 드렸다고 그러셨어요. 그리고 노스님(탄허)은 책을 안 사요. 스님은 대학자, 대강백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당연히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에게는 책이 없어요. 스님은 늘 책을 빌려 본 것입니다. 스님은 책을 빌려서 짧은 것은 외워버리고, 긴 것은 만년필로 필사를 해 가지고 봤답니다.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하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스님이 경전을 다 외우시니까 책이 많을 줄 아는데, 책이 없어요. 스님은 사집, 사교까지 다 번역을 하셨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서재의 책은 별로 없어요. 스님은 그런 식으로 번역을 다 하신 것입니다. -탄허 스님은 시간을 아껴서 번역을 하셨지요?
맞아요. 스님은 신도 공양청에 가셔도 시간이 나시면 원고를 쓰셨어요. 절대 시간이 난다고 잡담을 안 하십니다. 스님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몰라요. 스님은 저녁 아홉 시만 되면 주무십니다. 그러시고 나서 빠르면 새벽 한 시에 일어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두 시 경에는 일어나십니다. 그러면 한 시에 일어나시면, 더 자지를 않으시고 세면을 하시고 그냥 앉아서 한 시간 동안 정진을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는 책을 펴고, 원고를 쓰십니다. 그러면 아침 공양을 여섯시에 하시면 남들이 한나절에 한 것 이상을 벌써 새벽에 다 하신 것입니다. 신도가 와서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면 스님은 인사를 받고 간단한 안부를 물으시고 나서는 더 이상 자질구레한 말은 않으시고 딱 돌아서 원고를 쓰십니다. 그러면 신도가 미안해서 가곤 했지요. -탄허 스님의 학문, 강맥은 누구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독학해서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나요? 전강에 대한 것을 들려주세요.
탄허 스님이 평소에 하시는 말씀이 선방에서는 면면심수(面面心受)를 해야 하기에 반드시 시험을 거쳐서 인가를 받아야 되는 것이지만, 강원에는 전강이라는 것이 없었답니다. 스님은 전강이라는 괴이한 풍습을 무시하셨어요. 경전을 읽을 때에 불교에는 술어가 너무 많아서, 보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불교수준이 높아서 사전이 없어도 볼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불교가 배척을 받아서 경전을 보려면 깜깜절벽이었어요. 그래서 인악 스님, 연담 유일 스님 같은 거물 스님들이 나와서 경전을 주석해 놓은 것이 소위 사기(私記)입니다. 그 사기가 사전 역할을 한 것입니다. 사기가 없으면 경전을 못 봐요. 그런데 이것도 강사 스님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성격이 있었어요. 그래 사기는 필사본만 있지, 판각본이 없어요. 유통을 안 시켜서 그리 된 것입니다. 강사 스님들이 몰래 그것을 보면서 가르치고,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를 잘 받들어 주고 자신의 강맥을 이어나갈 사람에게 전달했어요. 그렇게 사기를 전달하는 것이 전강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사기는 기득권 유지 성격을 갖는 것이지요. 그래 탄허 스님의 앞에 어떤 스님이 와서 전강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내가 봤습니다. 그러면 스님은 “나는 한암 스님에게 전강 받은 일도 없는데, 무슨 놈의 전강이냐”고 하셨어요. 또 스님은 자기가 실력이 있으면 강사를 하지 말라고 해도 강사를 할 것이고, 자기가 실력이 없으면 아무리 강사를 하고 싶어도 강사를 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사전이 나온 이후에는 전강이라는 것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어요. 요즈음 하는 것은 자기 권속을 늘리는 방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탄허 스님은 6·25가 나기 전에 통도사로 피난을 가셨는데, 통도사에 있다가 경기도에 잠시 있다가 오대산으로 내려가셨는데, 그때에 망월사에 들르신 것 같습니다.
탄허 스님이 6·25가 나기 이전에 통도사 백련암으로 가셨을 때에 산중 대중들에게 몇 번 특강을 해주었는데, 그때 대중들을 놀라게 해준 일이 있었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통도사 산중의 대중들이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해서 하였는데, 대중들은 스님이 옛날 식으로 책을 펴놓고 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흑판을 몇 개 이어붙인 것을 놓고 강의를 하셨는데, 순전히 백묵만 갖고 외워 제끼니까 듣던 사람들이 놀래 버렸단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경전 강의를 하시면서 흑판을 갖고 하신 것은 탄허 스님을 최초로 봐야 합니다. -통도사에서의 칠판 강의에 대한 증언은 놀랍습니다.
제가 스님에게 여쭈어 봤어요. 언제부터 번역을 하시기 시작했냐구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당신 나이 마흔다섯 살(1957년) 때부터 번역을 시작했다고 그래요. 아마도 태백산 영은사 일소굴에서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화엄경이 10년인가, 9년 만에 탈고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화엄경을 배우게 된 것은 일제 때, 한암 스님의 회상에서 화엄론이 있었던 것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그때에 한암 스님께서 탄허 스님에게 강의를 하도록 시켰다고 그래요. 그때 스님은 한암 스님 앞에서 거의 선지에 입각해서 경전을 풀어내신 것이지요. 그걸 하다 보니, 머리에 흰 머리가 날 정도였는데, 그래서 그런 과정을 거쳐 토를 뗀 것이었다고 그러셨어요. 스님은 상원사에 처음 와서는 일체 경전을 안 보려고 3년간 선방에서 정진을 했대요. 그러나 한암 스님께서 글을 할 줄 아는 탄허 스님에게 글을 봐야 한다고 해서 그때부터 경을 보기 시작했다고 그러지요. 입산 이전에 한문을 달통하고 들어갔으니, 하루 종일 경만 읽었는데 탄허 스님이 경을 한암 스님 앞에서 쭉 읽기를 무려 7년간을 했대요. 그때에 경덕전등록, 선문염송을 다 봤다고 그러셨습니다. -탄허 스님의 경전관과 한암 스님의 경전관은 같았습니까?
스님은 한암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는데, 한암 스님의 경전관은 선의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탄허 스님 역시 그렇습니다.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으로 부터 선사의 안목으로 경전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선지로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탄허 스님의 강의가 일반 강사와는 달리 특수하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만약 한암 스님이 살아 있으면 지금도 한암 스님에게 배울 것은 선지를 통해서 경전을 보는 것을 배우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스님은 종지(宗旨)를 강조하셨습니다. 스님은 다른 강사들은 종지가 없다고 하시면서, 종지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글자만 새기는 것이며 죽은 학문이지 그러셨어요. 늘 종지를 강조했어요. -탄허 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저는 스님에게서 분명하게 들었어요. 스님은 책 한 권을 빌리면 그 책을 완전히 외울 때까지 보고, 그것을 외운 후에야 딴 책을 보셨답니다. 그것에 대한 하나의 예를 말하면, 스님은 기신론을 외우고 싶어서 외우신 것이 아니라,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도대체 종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종지가 드러날 때까지 반복해 읽다 보니,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스님을 가장 골탕을 먹인 책이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이라고 하셨지요. -탄허 스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내가 그것을 물어보았어요. “언제부터 학문에 대해 자신감이 생기셨습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화엄경을 번역한 이후에는 통 두려운 것이 없었고, 그때부터 자심감이 생겼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스님은 인재양성을 강조하셨어요. 미래의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를 키우시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점이 보통 큰스님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스님은 절대 사람의 장점을 보지, 단점을 보지 않아요. 단점이 10분의 9이고, 장점이 10분의 1이어도 장점 그것만을 봐요. 그런데 사람이 무난하더라도 아무런 장점이 없으면 사람으로 안 봐요.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해운 선생입니다. 스님은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지, 단점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교, 노자 도덕경의 번역을 끝내고 방산굴에다가 인재양성의 기반을 만들려고 하셨어요. 대전 학하리도 검토하였으나 거기는 터가 너무 작아서 안 되고, 월정사에다가 하시려고 구상을 했어요. 지금은 방산굴 앞이 선방이 되었지만 그곳은 경사진 밭이 제법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다가 방이 많은 집을 지어서, 쓸 만한 사람 20여 명을 받아서 공부를 시키려고 했어요. 절집에서 공부를 후원해 주는 구상을 했어요. 월정사가 후원해야, 절이 뒷받침을 해야 된다고 그러셨어요. 그런 꿈을 스님은 꾸었어요. 스님은 공개적인 강의를 한 일이 없어요. 어떤 경전 한 권을 놓고 강의를 하신 적은 평생 동안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강사로 자처한 적도 없어요. 그때 스님의 나이가 70이 되니깐 그런 생각을 하셨지만, 바로 병이 나서 돌아가셔서 실행이 되지 않았지요. 그때 스님은 20년을 더 산다고 그러셨어요. 만약 더 사셨으면 그것을 하셨을 거예요. 병이 안 났으면 하셨을 것입니다. 스님은 20년을 키우면 인재가 안 나오겠냐는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탄허 스님은 정치의식, 민족의식이 강하셨지요?
정치의식과 관련해서 스님에게 들은 말을 전해 드리지요. 당신이 6·25 무렵에 인민군이 와서 총을 들이댔다고 그래요. 그래서 스님이 “우리 불교도 사회주의이다. 봐라, 우리 불교는 삼의일발(三衣一鉢)밖에 더 있냐, 그리고 개인 소유가 없다. 그래서 절대평등한 제도를 만들었지 않느냐? 그러니 이것이 사회주의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대요. 그러자 인민군이 동무 그러냐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걱정 말라고 곧 해방시켜 줄 테니깐 하고 그냥 갔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스님의 아버지는 보천교의 핵심 간부로서 거기에 장관급이라고 하셨어요. 그 아버지는 6·25 때 인민군 치하에서 정읍의 군수를 했어요. 어떻게 보면 좌익이고, 온건하게 보면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당신은 부르조아지였지요. 또 스님은 민족·주체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원각경과 기신론을 번역하실 때에 원효소와 함허득통소를 활용한 것에서도 나와요. 그때에 스님은 우리나라에도 이런 스님의 좋은 책이 있는데, 굳이 중국 것을 이용할 필요가 없고 우리나라 스님의 것으로 해야 된다고 하셨지요. -탄허 스님의 정체성에 대한 소회를 갖고 계시나요? 제가 돌아가실 때에 한양대병원에 가서, 스님에게 “가시면 어디로 태어나시겠습니까?” 하고 여쭈었지요. 그랬더니 스님은 그 무엇으로 태어나도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나는 이 말씀을 듣고서 탄허 스님의 사상에는 노장학이 짙게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무위자연 사상이지요. 그 뒤로 얼마 안 돼 월정사로 가셔서 돌아가셨지요. 그리고 한암 스님의 전법제자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스님은 당신이 한암 스님의 전법제자라는 것을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한암 스님의 법은 보문 스님과 난암 스님이 이었는데 보문 스님은 불행히도 50으로 단명했고, 난암 스님은 일본에 가서 조총련의 거물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박정희가 난암 스님의 영향력이 커서, 그 스님을 회유하려고 탄허 스님을 일본에 보내서 만나보았답니다. 난암 스님에게 가보니 김일성의 사진은 대문짝만하게 걸어 놓고, 박정희 것은 조그만하게 걸어 놓았대요. 그리고 난암 스님이 김일성을 거의 수양아버지로 여기고, 방에는 김일성에게 받은 훈장이 즐비하였고, 석가나 공자도 김일성을 못 따라간다고 여겼으니 회유가 되겠어요. 그때 스님은 난암 스님이 준 신수대장경 원본을 받아서 가져왔어요. 그것이 학하리에 있었어요. 하여간 스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이 한암 스님의 수제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대산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없었고 다 떠나고 그랬지만, 오대산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탄허 스님 계열밖에 없으니 자동적으로 탄허 스님이 수제자가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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