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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스님, 학승 아니다”(불교닷컴)201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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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2-24 09:56 조회9,9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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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스님, 학승 아니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등에게 탄허 스님은?
2013년 02월 24일 (일) 02:14:24 조현성 기자 cetana@gmail.com

한국 근현대 최고 학승 탄허 스님(1913~1983). 유·불·선에 능통했던 스님은 교(敎)에만 능통했을까?

오대산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23일 월정사에서 탄허 스님 탄신 100주년 다례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탄허 스님은 교학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일치(禪敎一致)를 강조했던 선사”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탄허 스님은 교학을 종지적으로 다루고 유불선을 회통하는 안목이 뛰어났던 선지식이었다”며 “어록·경전을 두루 살펴 걸림이 없었고, 활발발한 무애한 선풍도 지녔다”고 회고했다.

   
▲ 탄허 스님 탄신 100주기 기념다례 하루전인 23일, 오대산 월정사 부주지 원행 스님, 주지 정념 스님, 삼보 스님, 각수 스님, 인보 스님이 기자회견을 열고 탄허 스님과의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탄허 스님의 수행법을 장자의 좌망(坐忘)이라며 도교식으로로 오해하는 시각도 있다.
정념 스님은 “탄허 스님은 한암 스님 지도하에 3년 여 묵언 수행했다. 또 새벽이면 좌선을 했다. 생각을 비운다는 뜻에서 ‘좌망’이지, 그 말만으로 화두 참구 여부를 논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스님은 역경을 하면서서도 일행삼매 경지에서 역경 작업을 했다”고도 말했다.

탄허 스님은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마음을 가벼이 여기는 마구니 종자가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또, “교학 하는 사람은 참선 해봐야 한다. 참선을 통해 교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지도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탄허 스님을 시봉했던 삼보 스님(동국대 이사), 각수 스님(월정사 선덕) 인보 스님(영월 금몽암)도 참석했다.

인보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서 이마는 사람의 운전수라며 항상 이마의 주름살을 펴라는 가르침을 들었다”며 “불교에서의 평등은 산이 높으면 높은 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스님은 탄허 스님을 시봉하며 영은사에서 여러 경전을 익혔다. 탄허 스님이 영은사에서 강의를 하던 1958년, 탄허 스님은 자신의 강의가 <화엄경>을 잘 알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보 스님은 “스승 탄허 스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공부를 놓지 않았던 스님”이라고 말했다.

   
▲ 인보 스님은 1956년 오대산에 입산해 출가생활을 시작했다. 탄허 스님을 시봉하며 많은 경전을 익혔다.

각수 스님은 1963년 봄 오대산에 입산했다. 탄허 스님을 시봉했지만 스님은 김용사에서 성철 스님과 정진하는 등 출가생활 대부분을 선방에서 지냈다.

스님은 “탄허 스님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난 분”이라며 “격외에서 노신 스님”이라고 말했다.

또, “스님은 평소에 아무 일이 없으면 묵묵히 책을 보고 그냥 앉아 있었다. 누가 묻기 전에는 답을 않았다”면서도 “스님은 무엇이든지 질문을 하면 답을 못하신 것이 없었다. 스님은 학문의 보고(寶庫)”라고 설명했다.

그런 스승은 수좌의 길을 걷는 상좌에게 <영가집>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참선을 하더라도 여가에 경전을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 각수 스님은 탄허 스님 제자로 제방선원에서 수행정진했다. 스님은 "탄허 스님은 참선하는 짬짬이 경전을 볼 것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삼보 스님은 1965년 오대산에 입산했다. 행자 20일 만에 탄허 스님을 시봉하던 행자가 야반도주해 스님을 시봉하게 됐다.

삼보 스님은 “처음 시봉 때 탄허 스님은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쌀쌀했다”면서도 “인간 기본 자세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 찾아오는 유생들이 계룡산 해운거사파, 무운거사파 등 서너 개였다”고 설명했다. 

탄허 스님은 인재불사를 강조했다. “절 열 채 짓는 것이 훌륭한 인재 한 명 키우는 것만 못하다.” 탄허 스님의 말씀이었다.

그런 스님도 자신 스스로 인재가 되기 위해 책을 손에 놓지 않는 등 큰 노력을 했다.

삼보 스님은 “탄허 스님은 ‘어릴 적 무척 가난했다’며 ‘먹을 것이 없어 큰 물동이에 사카린을 넣고 방을 드나들 때마다 마셨다’고 말했다. ‘종이가 없어 군불을 땔 때에는 숯을 갖고 글씨를 썼다’는 말도 들었다”고 말했다.

삼보 스님은 “탄허 스님은 부처님 법에는 무한 애정을 가졌지만 승려제도는 못마땅해 했다”며 “‘이래 갖고는, 이런 정신머리로는 불교가 안된다’는 것이 스님의 말씀이었다”고 회고했다.

스님은 “최근 언론이 탄허 스님을 예측가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시각은 문제가 많다. 스님의 정체성은 더욱 연구를 해서 말해야 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삼보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서 인간 기본 자세를 배웠다"며 "스님을 예측가로만 봐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탄허문화재단 이사장 혜거 스님도 24일 다례재에 앞서 기자들을 만나 “탄허 스님은 ‘예언은 소설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듣고 내버리는 것으로 기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탄허 스님은 “왜 예측을 하느냐”는 상좌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성인은 길을 제시하는 것뿐이고 사람들은 세월을 지내면서 그 길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혜거 스님은 “탄허 스님을 예언가, 도참사상가 차원으로 보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월정사는 탄허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스님과 인연 있는 출재가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해 <방산굴의 무영수>를 펴냈다. 또, 100주년 기념 다례를 기점으로 스님이 강조했던 화엄사상 선양에 매진할 계획이다.

주지 정념 스님은 “화엄사상은 극미세계부터 우주까지, 과거-현재-미래, 공간을 관통하는 교리로 다양성 가운데 소통, 평화를 꾀할 수 있다”며 “현대사회의 분열·대립의 해답은 (탄허 스님의) 화엄사상에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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