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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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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턴 나도 좀 즐기며 살아야지(현대불교) 201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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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4-27 09:14 조회8,6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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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턴 나도 좀 즐기며 살아야지
월정사 上
임연태 시인  webmaster@hyunbul.com
   
▲ 월정사의 중심공간인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국보제48호) 그리고 석조보살좌상
 
명산 중의 명산 오대산
 
 
‘국내의 명산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이고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오대산 월정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643년(선덕왕 12)에 창건한 월정사는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많은 고승대덕들이 머물며 수행과 전법을 이어 온 월정사는 한국전쟁으로 가장 크게 훼손 되었다. 1.4후퇴 때 아군에 의해 10여동의 건물이 전소되었고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범종마저 불타버렸다. 이 종은 신라 성덕대왕신종보다 주조연대가 앞선 것이어서 매우 귀중한 성보였기에 안타까움이 더한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월정사는 1964년 탄허(呑虛 1913~1983)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면서 중창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불사를 진행해 큰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대관령을 넘기 전 진부에서 왼쪽으로 드높게 펼쳐진 오대산의 산록들은 철철이 그 기묘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월정사 가는 길의 전나무 숲길 또한 일품이어서 절에 가는 길이 곧 극락에 이르는 길인 듯하다.
 
상원사로 가기 위해서는 월정사를 거쳐야 한다. 오대산 전체를 배경으로 하는 문수신앙이 월정사와 상원사 그리고 적멸보궁을 바탕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굳이 오대산과 그 품안의 절들을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산과 절이 둘이 아니게 지켜 온 불심은 천년 숲길의 맑은 공기가 되어 찾아오는 중생을 반긴다.
 
깨끗한 도량과 견성한 스님
맑은 도량과 수행하는 스님 그리고 유람에 나선 선비의 마음이 잘 어우러진 시 한 수를 보자.
 
월정유절처(月精幽絶處)
원각도량청(圓覺道場淸)
일조당번영(日照幢幡影)
풍전종경성(風傳鐘磬聲)
타응능견성(他應能見性)
아상미망정(我尙未忘情)
파필제시파(把筆題詩罷)
회두망옥경(回頭望玉京)
 
월정사가 아늑하게 들어선 곳
원각도량이 맑고 깨끗하네.
햇살 비처 당번에 그림자 지고
바람 불어 풍경 소리 들리네.
저 스님은 벌써 견성을 했을 텐데
나는 아직도 속세의 정을 못 잊고 있네.
붓 잡아 시를 짓고 나서
고개 돌려 서울 땅을 바라보노라.
 
고려 후기의 문신 이종학(李鍾學 1361~ 1392)의 시다. 이종학은 가정 이곡의 손자이고 목은 이색의 아들이니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요 충절 높은 선비 집안의 명현이라 하겠다. 이 시의 제목은 ‘오대산(五臺山)’인데 그가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읊은 시들을 모은 ‘관동록(關東錄)’에 수록되어 있고 ‘관동록’은 그의 문집 〈인재유고(麟齋遺稿)〉에 들어 있다.
 
시인은 월정사에 이르러 가장 먼저 맑고 깨끗한 도량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원각도량’이라는 말로 절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둘러보니 햇살과 그림자가 절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으니, 당과 번이 햇살에 비치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시각과 청각이 총동원되어 맑고 깨끗한 절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으로 월정사를 묘사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이 도량에서 수행하여 성불을 했을 스님을 부러워하는 심정과 속세의 정을 잊지 못하는 자신을 극적으로 대비 시켰으니 이 대목이 이 시의 절정일 수밖에. 그리고 절 풍경을 한 수의 시로 읊었지만, 여전히 속세로 달려가는 자신의 마음을 어쩔 수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인생은 꿈만 같은데
‘속세의 정을 못 잊는’ 것은 이종학도 그의 부친인 이색과 조부인 이곡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유학을 하는 선비로서, 정치인으로서, 관료라는 위치에서 맑은 도량은 언제나 객관적 대상일 뿐이었나 보다.
 
강릉귀로직(江陵歸路直)
행객독장음(行客獨長吟)
마영청산정(馬影靑山靜)
인성녹수심(人聲綠樹深)
부생혼사몽(浮生渾似夢)
세사매상심(世事每傷心)
종차당행락(從此當行樂)
나지득지금(那知得至今)
 
강릉 가는 곧은길에서
길손이 홀로 긴 시를 읊노라.
말 그림자 푸른 산에 고요하고
인기척은 푸른 숲 깊숙한 데서 들려오네.
뜬구름 같은 인생은 온통 꿈만 같아
세상일에 매번 마음이 상하곤 하네.
이제부턴 나도 좀 즐기며 살아야지
오늘 여기에 이를 줄 어찌 알았으랴.
 
이종학이 월정사를 들렀다가 며칠을 머물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을 떠나며 남긴 시다. 역시 ‘관동록’에 수록되어 있고 제목은 ‘20일에 월정사를 떠나며(二十日出月精寺)’로 되어 있다.
 
앞의 시에서 견성한 스님을 부러워하는 심정을 드러내 보인 이종학은 월정사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절절하게 느낀 모양이다. 시의 앞부분은 오대산의 푸른 숲을 그리고 있지만 뒤에서는 온통 인생에 대한 관조로 이어진다. 특히 ‘이제부턴 나도 좀 즐기며 살아야지’라는 대목은 시적으로 절창이라기보다 인생의 참맛을 토해낸 진실한 고백이라 할 만하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깊이 토해냈을 말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이를 줄 어찌 알았으랴’라는 마지막 구절은 그의 삶과 연관해 묘한 탄식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를 지을 당시에는 월정사를 떠나며 다시 속세로 가야하는 아득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던 해에 정몽주의 살해에 뒤이어 이숭인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유배지를 옮기는 도중 한 마을에서 살해당했다. 나라는 망하여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고, 선비로서의 곧은 절개를 지키는 길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유배지에서 하늘을 우러러 소리치지 않았을까? ‘오늘 여기에 이를 줄 어찌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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