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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큰스님 글씨-월정사의 한암과 탄허(일간투데이) 201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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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12-12 09:08 조회8,8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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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큰스님 글씨-월정사의 한암과 탄허
국립춘천박물관 특별전 열어
김재봉 기자 kimjaibong@gmail.com
   
▲ 탄허 스님의 글쓰는 모습
[강원=일간투데이 김재봉 기자] 국립춘천박물관(관장 최선주)은 2013년 12월 17일(화)부터 2014년 2월 23일(일)까지 특별전 ‘한국의 큰스님 글씨-월정사의 한암(漢岩)과 탄허(呑虛)’를 개최한다. 탄허(1913~1983)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본 전시에는 평창 월정사, 대전 자광사, 양산 통도사, 안양 한마음선원, 서울 탄허기념박물관, 탄허불교문화재단에서 대여한 서예작품, 탁본, 현판 등 100여점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는 오대산 월정사의 두 큰스님인 한암(1876~1951)과 탄허(1913~1983)의 글씨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암과 탄허의 글씨는 한국 서예 전통에서 선필(禪筆)의 범주에 속한다. 선필은 품격있고 개성있는 필치로 깨달음을 표출하는 글씨이지만, 넓게는 스님의 글씨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근현대 변혁의 시대를 살다간 두 스님은 전통적인 유학과 고전을 수학하며 성장했다. 그들의 글씨는 불교의 경전과 깨달음, 고전의 경구, 삶의 자세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유연하게 쓴 한문 글씨뿐만 아니라 잔잔한 한글 글씨가 갖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며, 특히 편지글에서는 글씨를 통해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한암(1876~1951)은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을 지키고 법맥을 계승하여 근대 한국 불교를 중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암은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을 닦던 중 불교에 귀의했다. 당대의 유학과 불교학의 권위자였던 한암은 그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승려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식인들이 찾고 따랐으며, 그의 수제자 중 한 명이 탄허이다.

선승이자 학승인 한암은 참선(參禪)을 중시했지만, 계율을 지키고 경전을 연구하고 학문하는 자세를 함께 갖춰야만 올바른 수행,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평생 이를 실천했다. 불교계의 귀감이 된 한암의 이러한 자세는 고려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전통 선풍을 계승한 것으로, 오늘날 한암은 고려시대 이래의 정통 법맥의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한편 한암은 1951년 1.4 후퇴 때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의 소각 위기를 온몸으로 지켜낸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 이전인 1941년 조계종(曹溪宗)이 새로 출범할 때 초대 종정(宗正)을 역임했다.

한암의 글씨는 그의 학식과 인품의 면모를 보여주듯 단정하고 정적인 필치로 격조 높은 선비의 글씨를 보는 듯하다. 그가 남긴 편지 글은 근대 국한문, 한글 글씨의 중요한 자료이다.

한암의 수제자인 탄허는 근현대 우리나라의 불교계를 이끈 최고의 학승이며,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에 능통한 대석학이었다. 독립운동가 김홍규(金洪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탄허는 기호학파(畿湖學派) 학통을 이은 스승 이극종(李克宗-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을 통해 한학 연구를 계속하여 10대 후반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해결되지 않는 도(道)의 근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당시 최고의 선승 한암과 3년간의 학문에 대한 서신 문답 끝에 22세 때 한암의 제자가 되었다. 탄허는 스승 한암의 법통을 계승했고, 이를 불교학 연구와 불교의 중흥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번 전시와 연계하여 개막식 당일 12월 17일(화) 14:00~15:00에 국립춘천박물관 대강당에서는 혜거 스님(탄허기념박물관장)의 초청강연 “허공을 삼킨 사자후”가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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