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부처도 못 섬기면서 부처님 마지 올려 무엇해(현대불교)20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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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9-03 09:09 조회9,891회 댓글0건본문
“남편부처도 못 섬기면서 부처님 마지 올려 무엇해” | ||||||
방산굴의 無影樹 〈28〉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활안 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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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살아와도 스님 못 당할 것 물 흘러가듯 써내려 가시고 폭포수처럼 읽고 장강수처럼 해설 유불선 달통한 종합적인 도인 -스님의 책 〈내가 만난 선지식〉에 보면 탄허 스님과의 인연이 간략하게 나옵니다. 어떻게 그런 인연을 갖게 되었는지 이번 기회에 알려주세요.
저는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우연한 기회에 송광사에 구경갔다가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에 만난 스님이 추강 스님이라고 송광사 주지까지 지낸 아주 훌륭한 스님입니다. 추강 스님을 만나고 나서 절에 들어왔는데, 효봉 스님이 그때 사미 신분으로 있었어요. 그때가 1957년 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송광사에서 추강 스님의 큰상좌인 벌교상고 교장선생님(조용순)의 상좌가 되어서 승적에까지 올라갔어요. 그때에는 비구, 대처 싸움의 후유증이 있을 때여서 거기에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스님들이 싸우는 것을 보니 불교가 좀 이상 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래도 효봉 스님을 만나니 싸우는 일반 스님들과는 부류가 다르다고 보이고, 도를 닦는 스님도 있구나 그렇게 여겼지요. 그런데 추강스님이 통도사, 해인사로 편지를 내서 저를 강원에 보내려고 하였더니, 송광사는 대처승 절이라 받아줄 수가 없다고 연락이 왔어요. 사실은 송광사가 그렇지도 않았는데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추강 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사정을 말해서 내가 오대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래서 탄허 스님에게 배우게 된 것이지요. -그랬군요. 오대산으로 들어오게 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사실은 추강 스님이 나보다 먼저 오대산에 가서 탄허 스님을 만나서 동의를 받아 놓고서, 나에게 편지로 통지를 했어요. 동의를 받아놨으니 오대산으로 오라고. 그래 나는 서울로 가서 마장동에서 평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에서부터는 걸어서 오대산으로 들어왔지요. 그때가 1957년 10월인가 가을이었어요. 월정사에 와서 탄허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하시면서 뒷방에 가서 다른 스님들과 같이 있으라고 그러셨지요. 그때에는 강원이라고 하질 않고 오대산 수도원이라고 그랬어요. 수도원 간판이 인법당에 걸려 있었어요. -오대산 수도원의 정황과 탄허 스님에게 배운 것을 들려주세요.
그때 탄허 스님에게 배우던 사람들과 함석집에 있는 대처승 계열의 스님들을 모두 합치면 60여 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탄허 스님에게 배우던 사람이 30명 가까이 되었어요. 그때에 보니 인법당에 있는 사람들과 함석집에 있던 사람들은 견원지간(犬猿之間)처럼 서로 말도 안 하고 그랬어요. 나는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 일체 말도 않고 사람들하고 사귀지도 않았죠. 그때에 희찬 스님도 먼 발치에서 보았는데 날카롭고 지혜로운 인상이었는데 나야 저 밑에 있으니 그냥 보는 것뿐이었지요. 나는 인법당에서 지냈는데 배운 것은 대중들과 함께 배운 노자 도덕경입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상급반 스님들은 600부 반야경을 탄허 스님에게 따로 배웠는데, 나는 거기에도 가서 들었지요. 38권, 39권을 배웠어요. 그때 같이 배우던 스님들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고 우담 스님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이 스님의 출신은 알지 못하는데, 몇 년 전에도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저는 지금 그 스님을 찾고 있는데, 만나면 제가 머무는 절인 구기동 문수원에서 같이 지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각성 스님도 기억이 나고, 이북 출신, 문인 출신과 문필가가 두세 명이 있었던 것은 어렴풋하게 생각납니다. 그 후에 내가 각성 스님을 금강선원에 모셔서 강의를 시켰는데, 그때 자기도 수도원에 있었다고 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나하고 같이 하고 그랬어요. -그때 어렵게 공부하였다고 그럽니다만.
발우공양을 하였는데, 저는 늦게 온 막내이니깐 맨뒤에서 두 번째로 공양을 하였어요. 그런데 찬상을 두 개 정도로 준비하여 돌리는데, 그 반찬이 우리 옆에 오기도 전에 다 끝나 버렸어요. 밥은 쌀에다가 보리, 감자, 옥수수를 섞은 꽁보리밥인데 반찬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기름에 소금을 볶아서 찬 대용으로 먹었어요. 밥은 물에 말아서 먹고요. 사람이 정말 지내기가 어려웠지요. 어떤 수도생은 빈혈로 쓰러지기도 했어요. 그런 식으로 지냈어요. 그리고 월정사의 개울인 금강연에 흐르는 물을 떠다 먹으면 조금 멀어서 절의 구석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서 30여 명의 물을 살살 떠서 주전자에 길어와서 먹고 그랬는데 흙냄새가 나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때에 본 탄허 스님의 인상을 말씀해 주세요. 스님은 얼굴이 잘 생겼지요. 상호가 탱화 속의 아난 존자와 같았어요. 찡그리는 상호가 아녜요. 스님이 칠판에서 강의하는 것을 들으면 기가 막힙니다. 처음에는 탄허 스님 강의에 놀랬지요. 스님은 강의를 책을 보지 않고 외워서 쫙 하시는데, 물 흘러가듯 써내려 가시고 폭포수처럼 읽고 장강수처럼 해설하셨지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학자는 저래야 된다고 생각하였어요. 나는 입산 전에 우리 아버지에게 한문을 좀 배우고 왔는데, 우리 아버지는 탄허스님에 댈것이 아니었어요. 그때 스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장자의 한 구절, “천하에 털끝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태산보다 작은 것이 없다. 옛이 옛이 아니고 지금이 지금이 아니다. 천지와 만물이 일체가 되면 시간도 공간도 인간도 그 시종(始終)을 말할 수 없고, 그 광협(廣狹)을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은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요. 그러시면서 스님은 언어 이전, 생각 이전의 도를 연상할 수 있게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수도원이 해산되었는가요?
그것이 내가 가서 두 달이 되었는데, 월정사 위에 있던 마을의 처녀 아버지가 절에 와서 똥바가지를 던지면서 “똥보다 더러운 중놈들아, 다 나가라”고 하면서 난리를 쳤어요. 그것이 어떤 일이냐 하면 수도생 중에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마을 처녀와 사귀다가 처녀가 애를 배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처녀 아버지가 와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 처녀는 동네 가게집 딸인데 이종욱 스님 친척의 조카딸이라는 것을 거기에서 들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 모르지요. 그러니깐 탄허 스님이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수도원이 해산된 것입니다. 나는 딴 생각이 없이 공부만 해서, 공부를 조금 익혀가다가 그만 깨진 것이지요. 어쨌든, 그때에 밤이 되면 상급생들은 서너 명이 짝을 지어 절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우리는 순수하고 모르니깐 초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고 그랬지만. -수도원이 해산이 되어서 어디로 가셨는가요?
수도원이 해산이 되어서 상원사로 추강 스님을 찾아갔죠. 가서는 스님에게 “절이 시끄럽고 어수선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으로 가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그러면 여기서 나하고 같이 살자”고 그래서 상원사에 머물게 되었지요. -동국대에 다닐 적에 탄허 스님과의 인연은 없었는가요?
제가 동국대 다니던 1960년대 초반은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려웠어요. 그때에는 불교 책이 아주 귀했어요. 학교 다닐 적에 석주 스님은 어떤 개인이 불교 책을 낸 것을 보면 50권, 100권을 모아다 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그냥 나누어 주었어요. 그때에 탄허 스님의 〈육조단경〉과 〈보조법어〉가 나왔어요. 선학원에 계신 석주 스님은 우리를 부르시고는 탄허 스님의 책을 그냥 주었어요. 우리 학생들은 너무 미안해서 적은 돈이지만 모아서 그것을 석주 스님에게 갖다 드렸지요. 그때 제가 그런 모금 활동을 주관하면서 탄허 스님의 책을 환희심으로 읽고 그랬어요. 석주 스님은 필요한 사람에게 책을 늘 주셨지요. 스님께서 늘 그렇게 하셨기에 저는 석주 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주 찾아뵙고, 인연을 갖고 모셨지요. 난 탄허 스님의 책은 달달 외웠어요. 우리들의 신심, 불심은 보조 스님의 수심결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이 〈보조법어〉에 있었지요. 나는 스님 책에서 발심이 된 거지요. -알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탄허 스님을 어디에서 다시 만났는가요?
저는 동국대 불교과를 1962년에 들어가서 1965년에 졸업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1966년부터는 가평에 상락향수도원을 만들어서 포교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탄허 스님은 1966년부터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오셨지만, 저는 졸업을 해서 학교에서는 뵙지를 못했죠. 그러다가 제가 1970년 경 미아리에 정혜고등공민학교를 창설했어요. 그리고 미아리 영미암에서는 야학을 열었어요. 왜 그렇게 하였는가 하면 서울 시내의 필동 이런 곳의 판자집에 있었던 사람들을 강제로 미아리 근처로 이주를 시켜놨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아리에서 버스를 타려면 6~7km를 걸어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러니깐 학교를 다닐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런 사정을 알고 공민학교와 야학을 열었어요. 그러면서 제 스승인 황성기 교수님이 하시던 불교사상연구회 활동에도 참여했어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서울 시내에 자주 오게 되었지요. 그때에 스님께서 청룡사에서 계시면서 강의를 열었다는 소문이 서울 시내에 다 퍼졌어요. 나는 영미암의 법사로 있었는데, 동국대 박선영도 나와 같이 법사로 있었지요. 그 소문을 듣고 나도 청룡사에 가서 스님의 강의를 들었어요. 그때 사람이 많이 왔어요. 150여 명이 되었을 겁니다. 그 무렵인가 스님의 제자가 청룡사지를 펴냈지요. 나는 그때에 나온 그 사지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내가 그때 강의를 들은 인연으로 청룡사 법회를 근래까지 10여 년간이나 봐 줬어요. 윤호 스님은 탄허 스님을 잘 모셨는데, 청룡사 스님들은 우리 같은 스님이지만 계통이 양반 출신이에요. -대원암에서는 만나지 않았는가요?
대원사에도 두세 번 찾아갔지요. 화엄경을 읽다 보니 신중(神衆)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서 찾아가 여쭈어 봤지요. 화엄경에 왜 그렇게 귀신 이야기가 많이 나오냐고 하니까 그것은 수행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 그리 보지 말라고 바로 일러 주시더군요. 그때 스님은 19신장이 옹호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고, 8부신장이 옹호하면 전륜성왕이 될 수 있고, 12천신이 도와주면 삼계도사도 될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지금도 하는 화엄경 강의에 스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스님의 장자 강의가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가 학생들과 함께 탄허 스님에게 가서 1주일간 장자를 배웠다고 하지요. 그런데 양주동 박사가 “만약 장자가 다시 살아와도 탄허스님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고 해요. 나는 이 말을 양주동 박사를 따라 같이 간 학생들에게서 들었어요. 그 학생들은 그 후에 교수가 되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탄허 스님과의 다른 추억은 없을까요? 그게 월정사에서 국수 공양을 엄청 받아먹은 이야기이지요. 원주에 사는 어떤 거사가 자기 부인이 매년 막내아들 생일 불공을 위해 쌀 한 가마니에 월급 한 달 치를 쓰는 것이 미워서, 그 보살을 욕을 해댔는가 봐요. 이를 안 탄허 스님은 그 보살에게 “남편부처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부처님께 마지를 올려서 무슨 덕을 보겠느냐”면서 야단을 쳤대요. 이 말을 전해들은 막내아들이 보살에게 자기를 위해 8년간이나 불공을 드려주었으니, 이제는 자기가 아버지를 위해 불공을 드리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돼지저금통을 털어서 그날 저녁상을 아버지를 위해 근사하게 대접하고 절을 하였던 것이지요.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는 전후사정을 듣고서는 겸연쩍어서 너희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스님이 누구인가 알고 싶다면서 탄허 스님을 찾아와서 한 달 치 월급으로 대중공양을 냈는데, 절이니깐 만두와 국수를 얼마나 많이 가져왔는지 어떤 스님이 먹고 나서 일어서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왈칵 게워내서 방안이 국수 천지가 되었대요. 그러면서 그 거사가 탄허 스님에게 크게 참회를 하였다고 그래요. 그래서 탄허 스님은 그 거사에게 불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거사는 그 후에 원주에서 절을 짓고 불교 외호활동을 무척 하였어요. 나는 그 일화를 탄허 스님에게 간단하게 들었지요. 그런데 내가 원주에 법문하러 갔다가, 불심사라는 절에 가서 공양의 전후사정을 자세하게 들어서 알게 되었지요. 그 주인공이 알고 보니 원주시청에 다니던 공무원 불자였어요. 그 사람은 독실한 불자가 되어서, 탄허 스님에게 불심이라는 이름을 받고 시청에다가 여덟 명이 참가하는 불심회라는 거사회를 만들었고, 원주 시내에 불심사라는 절을 만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월정사 출신인 현각 스님을 불심사 주지로 모시고 활동하였어요. -탄허 스님의 강의는 유명하였지요?
그럼요. 나는 스님 강의를 청룡사에서도 들었지만 삼보법회에서 주관할 때에도 가서 들었어요. 우리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들었지요. 스님의 강의는 종통, 설통이에요. 스님의 근본적 설명을 들으면 저절로 거기에 빨려 들어가지요. 환희심이 나고, 신바람이 나요. -탄허 스님을 어떤 분으로 보시나요?
나는 스님을 종합적인 도인으로 봅니다. 종합적인 도인이에요. 스님은 유불선 모든 것에 달통하셨지요. 이런 스님은 앞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지금은 그런 스님을 찾아볼 수가 없지요. -탄허 스님 생각이 나세요?
내가 강의를 하다 보면 스님 생각이 많이 나지요. 보통 스님들은 경전의 풀이밖에 하지 못하지만, 탄허 스님은 내용이 다 터져서 강의를 하셨어요. 다른 스님은 남의 말을 건성으로 하지만, 탄허 스님은 절대 남의 말을 설명하는 것이 아네요. 자기 체험 속에서 우러나온 것을 말씀하셨지요. -스님의 책 〈내가 만난 선지식〉에 보면 탄허 스님과의 인연이 간략하게 나옵니다. 어떻게 그런 인연을 갖게 되었는지 이번 기회에 알려주세요. 저는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우연한 기회에 송광사에 구경갔다가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에 만난 스님이 추강 스님이라고 송광사 주지까지 지낸 아주 훌륭한 스님입니다. 추강 스님을 만나고 나서 절에 들어왔는데, 효봉 스님이 그때 사미 신분으로 있었어요. 그때가 1957년 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송광사에서 추강 스님의 큰상좌인 벌교상고 교장선생님(조용순)의 상좌가 되어서 승적에까지 올라갔어요. 그때에는 비구, 대처 싸움의 후유증이 있을 때여서 거기에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스님들이 싸우는 것을 보니 불교가 좀 이상 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래도 효봉 스님을 만나니 싸우는 일반 스님들과는 부류가 다르다고 보이고, 도를 닦는 스님도 있구나 그렇게 여겼지요. 그런데 추강스님이 통도사, 해인사로 편지를 내서 저를 강원에 보내려고 하였더니, 송광사는 대처승 절이라 받아줄 수가 없다고 연락이 왔어요. 사실은 송광사가 그렇지도 않았는데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추강 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사정을 말해서 내가 오대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래서 탄허 스님에게 배우게 된 것이지요. -그랬군요. 오대산으로 들어오게 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사실은 추강 스님이 나보다 먼저 오대산에 가서 탄허 스님을 만나서 동의를 받아 놓고서, 나에게 편지로 통지를 했어요. 동의를 받아놨으니 오대산으로 오라고. 그래 나는 서울로 가서 마장동에서 평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에서부터는 걸어서 오대산으로 들어왔지요. 그때가 1957년 10월인가 가을이었어요. 월정사에 와서 탄허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하시면서 뒷방에 가서 다른 스님들과 같이 있으라고 그러셨지요. 그때에는 강원이라고 하질 않고 오대산 수도원이라고 그랬어요. 수도원 간판이 인법당에 걸려 있었어요. -오대산 수도원의 정황과 탄허 스님에게 배운 것을 들려주세요.
그때 탄허 스님에게 배우던 사람들과 함석집에 있는 대처승 계열의 스님들을 모두 합치면 60여 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탄허 스님에게 배우던 사람이 30명 가까이 되었어요. 그때에 보니 인법당에 있는 사람들과 함석집에 있던 사람들은 견원지간(犬猿之間)처럼 서로 말도 안 하고 그랬어요. 나는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 일체 말도 않고 사람들하고 사귀지도 않았죠. 그때에 희찬 스님도 먼 발치에서 보았는데 날카롭고 지혜로운 인상이었는데 나야 저 밑에 있으니 그냥 보는 것뿐이었지요. 나는 인법당에서 지냈는데 배운 것은 대중들과 함께 배운 노자 도덕경입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상급반 스님들은 600부 반야경을 탄허 스님에게 따로 배웠는데, 나는 거기에도 가서 들었지요. 38권, 39권을 배웠어요. 그때 같이 배우던 스님들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고 우담 스님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이 스님의 출신은 알지 못하는데, 몇 년 전에도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저는 지금 그 스님을 찾고 있는데, 만나면 제가 머무는 절인 구기동 문수원에서 같이 지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각성 스님도 기억이 나고, 이북 출신, 문인 출신과 문필가가 두세 명이 있었던 것은 어렴풋하게 생각납니다. 그 후에 내가 각성 스님을 금강선원에 모셔서 강의를 시켰는데, 그때 자기도 수도원에 있었다고 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나하고 같이 하고 그랬어요. -그때 어렵게 공부하였다고 그럽니다만.
발우공양을 하였는데, 저는 늦게 온 막내이니깐 맨뒤에서 두 번째로 공양을 하였어요. 그런데 찬상을 두 개 정도로 준비하여 돌리는데, 그 반찬이 우리 옆에 오기도 전에 다 끝나 버렸어요. 밥은 쌀에다가 보리, 감자, 옥수수를 섞은 꽁보리밥인데 반찬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기름에 소금을 볶아서 찬 대용으로 먹었어요. 밥은 물에 말아서 먹고요. 사람이 정말 지내기가 어려웠지요. 어떤 수도생은 빈혈로 쓰러지기도 했어요. 그런 식으로 지냈어요. 그리고 월정사의 개울인 금강연에 흐르는 물을 떠다 먹으면 조금 멀어서 절의 구석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서 30여 명의 물을 살살 떠서 주전자에 길어와서 먹고 그랬는데 흙냄새가 나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때에 본 탄허 스님의 인상을 말씀해 주세요. 스님은 얼굴이 잘 생겼지요. 상호가 탱화 속의 아난 존자와 같았어요. 찡그리는 상호가 아녜요. 스님이 칠판에서 강의하는 것을 들으면 기가 막힙니다. 처음에는 탄허 스님 강의에 놀랬지요. 스님은 강의를 책을 보지 않고 외워서 쫙 하시는데, 물 흘러가듯 써내려 가시고 폭포수처럼 읽고 장강수처럼 해설하셨지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학자는 저래야 된다고 생각하였어요. 나는 입산 전에 우리 아버지에게 한문을 좀 배우고 왔는데, 우리 아버지는 탄허스님에 댈것이 아니었어요. 그때 스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장자의 한 구절, “천하에 털끝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태산보다 작은 것이 없다. 옛이 옛이 아니고 지금이 지금이 아니다. 천지와 만물이 일체가 되면 시간도 공간도 인간도 그 시종(始終)을 말할 수 없고, 그 광협(廣狹)을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은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요. 그러시면서 스님은 언어 이전, 생각 이전의 도를 연상할 수 있게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수도원이 해산되었는가요?
그것이 내가 가서 두 달이 되었는데, 월정사 위에 있던 마을의 처녀 아버지가 절에 와서 똥바가지를 던지면서 “똥보다 더러운 중놈들아, 다 나가라”고 하면서 난리를 쳤어요. 그것이 어떤 일이냐 하면 수도생 중에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마을 처녀와 사귀다가 처녀가 애를 배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처녀 아버지가 와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 처녀는 동네 가게집 딸인데 이종욱 스님 친척의 조카딸이라는 것을 거기에서 들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 모르지요. 그러니깐 탄허 스님이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수도원이 해산된 것입니다. 나는 딴 생각이 없이 공부만 해서, 공부를 조금 익혀가다가 그만 깨진 것이지요. 어쨌든, 그때에 밤이 되면 상급생들은 서너 명이 짝을 지어 절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우리는 순수하고 모르니깐 초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고 그랬지만. -수도원이 해산이 되어서 어디로 가셨는가요?
수도원이 해산이 되어서 상원사로 추강 스님을 찾아갔죠. 가서는 스님에게 “절이 시끄럽고 어수선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으로 가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그러면 여기서 나하고 같이 살자”고 그래서 상원사에 머물게 되었지요. -동국대에 다닐 적에 탄허 스님과의 인연은 없었는가요?
제가 동국대 다니던 1960년대 초반은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려웠어요. 그때에는 불교 책이 아주 귀했어요. 학교 다닐 적에 석주 스님은 어떤 개인이 불교 책을 낸 것을 보면 50권, 100권을 모아다 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그냥 나누어 주었어요. 그때에 탄허 스님의 〈육조단경〉과 〈보조법어〉가 나왔어요. 선학원에 계신 석주 스님은 우리를 부르시고는 탄허 스님의 책을 그냥 주었어요. 우리 학생들은 너무 미안해서 적은 돈이지만 모아서 그것을 석주 스님에게 갖다 드렸지요. 그때 제가 그런 모금 활동을 주관하면서 탄허 스님의 책을 환희심으로 읽고 그랬어요. 석주 스님은 필요한 사람에게 책을 늘 주셨지요. 스님께서 늘 그렇게 하셨기에 저는 석주 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주 찾아뵙고, 인연을 갖고 모셨지요. 난 탄허 스님의 책은 달달 외웠어요. 우리들의 신심, 불심은 보조 스님의 수심결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이 〈보조법어〉에 있었지요. 나는 스님 책에서 발심이 된 거지요. -알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탄허 스님을 어디에서 다시 만났는가요?
저는 동국대 불교과를 1962년에 들어가서 1965년에 졸업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1966년부터는 가평에 상락향수도원을 만들어서 포교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탄허 스님은 1966년부터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오셨지만, 저는 졸업을 해서 학교에서는 뵙지를 못했죠. 그러다가 제가 1970년 경 미아리에 정혜고등공민학교를 창설했어요. 그리고 미아리 영미암에서는 야학을 열었어요. 왜 그렇게 하였는가 하면 서울 시내의 필동 이런 곳의 판자집에 있었던 사람들을 강제로 미아리 근처로 이주를 시켜놨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아리에서 버스를 타려면 6~7km를 걸어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러니깐 학교를 다닐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런 사정을 알고 공민학교와 야학을 열었어요. 그러면서 제 스승인 황성기 교수님이 하시던 불교사상연구회 활동에도 참여했어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서울 시내에 자주 오게 되었지요. 그때에 스님께서 청룡사에서 계시면서 강의를 열었다는 소문이 서울 시내에 다 퍼졌어요. 나는 영미암의 법사로 있었는데, 동국대 박선영도 나와 같이 법사로 있었지요. 그 소문을 듣고 나도 청룡사에 가서 스님의 강의를 들었어요. 그때 사람이 많이 왔어요. 150여 명이 되었을 겁니다. 그 무렵인가 스님의 제자가 청룡사지를 펴냈지요. 나는 그때에 나온 그 사지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내가 그때 강의를 들은 인연으로 청룡사 법회를 근래까지 10여 년간이나 봐 줬어요. 윤호 스님은 탄허 스님을 잘 모셨는데, 청룡사 스님들은 우리 같은 스님이지만 계통이 양반 출신이에요. -대원암에서는 만나지 않았는가요?
대원사에도 두세 번 찾아갔지요. 화엄경을 읽다 보니 신중(神衆)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서 찾아가 여쭈어 봤지요. 화엄경에 왜 그렇게 귀신 이야기가 많이 나오냐고 하니까 그것은 수행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 그리 보지 말라고 바로 일러 주시더군요. 그때 스님은 19신장이 옹호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고, 8부신장이 옹호하면 전륜성왕이 될 수 있고, 12천신이 도와주면 삼계도사도 될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지금도 하는 화엄경 강의에 스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스님의 장자 강의가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가 학생들과 함께 탄허 스님에게 가서 1주일간 장자를 배웠다고 하지요. 그런데 양주동 박사가 “만약 장자가 다시 살아와도 탄허스님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고 해요. 나는 이 말을 양주동 박사를 따라 같이 간 학생들에게서 들었어요. 그 학생들은 그 후에 교수가 되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탄허 스님과의 다른 추억은 없을까요? 그게 월정사에서 국수 공양을 엄청 받아먹은 이야기이지요. 원주에 사는 어떤 거사가 자기 부인이 매년 막내아들 생일 불공을 위해 쌀 한 가마니에 월급 한 달 치를 쓰는 것이 미워서, 그 보살을 욕을 해댔는가 봐요. 이를 안 탄허 스님은 그 보살에게 “남편부처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부처님께 마지를 올려서 무슨 덕을 보겠느냐”면서 야단을 쳤대요. 이 말을 전해들은 막내아들이 보살에게 자기를 위해 8년간이나 불공을 드려주었으니, 이제는 자기가 아버지를 위해 불공을 드리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돼지저금통을 털어서 그날 저녁상을 아버지를 위해 근사하게 대접하고 절을 하였던 것이지요.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는 전후사정을 듣고서는 겸연쩍어서 너희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스님이 누구인가 알고 싶다면서 탄허 스님을 찾아와서 한 달 치 월급으로 대중공양을 냈는데, 절이니깐 만두와 국수를 얼마나 많이 가져왔는지 어떤 스님이 먹고 나서 일어서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왈칵 게워내서 방안이 국수 천지가 되었대요. 그러면서 그 거사가 탄허 스님에게 크게 참회를 하였다고 그래요. 그래서 탄허 스님은 그 거사에게 불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거사는 그 후에 원주에서 절을 짓고 불교 외호활동을 무척 하였어요. 나는 그 일화를 탄허 스님에게 간단하게 들었지요. 그런데 내가 원주에 법문하러 갔다가, 불심사라는 절에 가서 공양의 전후사정을 자세하게 들어서 알게 되었지요. 그 주인공이 알고 보니 원주시청에 다니던 공무원 불자였어요. 그 사람은 독실한 불자가 되어서, 탄허 스님에게 불심이라는 이름을 받고 시청에다가 여덟 명이 참가하는 불심회라는 거사회를 만들었고, 원주 시내에 불심사라는 절을 만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월정사 출신인 현각 스님을 불심사 주지로 모시고 활동하였어요. -탄허 스님의 강의는 유명하였지요?
그럼요. 나는 스님 강의를 청룡사에서도 들었지만 삼보법회에서 주관할 때에도 가서 들었어요. 우리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들었지요. 스님의 강의는 종통, 설통이에요. 스님의 근본적 설명을 들으면 저절로 거기에 빨려 들어가지요. 환희심이 나고, 신바람이 나요. -탄허 스님을 어떤 분으로 보시나요?
나는 스님을 종합적인 도인으로 봅니다. 종합적인 도인이에요. 스님은 유불선 모든 것에 달통하셨지요. 이런 스님은 앞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지금은 그런 스님을 찾아볼 수가 없지요. -탄허 스님 생각이 나세요? 내가 강의를 하다 보면 스님 생각이 많이 나지요. 보통 스님들은 경전의 풀이밖에 하지 못하지만, 탄허 스님은 내용이 다 터져서 강의를 하셨어요. 다른 스님은 남의 말을 건성으로 하지만, 탄허 스님은 절대 남의 말을 설명하는 것이 아네요. 자기 체험 속에서 우러나온 것을 말씀하셨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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