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의 佛心 다시 밝힌다(강원도민일보) 201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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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3-11 09:28 조회9,023회 댓글0건본문
한암의 佛心 다시 밝힌다 | ||||||
25일 입적 63주기 추모 다례재 6·25때 상원사 지킨 일화 유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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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이 스물네살 때 어느 하루, 경허화상을 모시고 차를 마시다가 경허화상이 ‘선요’의 한구절인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라는 문답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묻자, 한암은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瓦墻)이 앞에 섰다”고 답했다. 경허화상은 이튿날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고 인가했다.
선풍을 중흥시킨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 대종사가 입적한지 63주년을 맞았다. 1951년 3월 21일(음력 2월 14일)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세수 75세, 법랍 54세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오대산 월정사(주지 퇴우 정념)는 ‘한암대종사 63주기 추모다례재’를 25일 오전 10시 30분 월정사 적광전에서 봉행한다. 이날 추모 다례재는 종사영반을 시작으로 헌화·헌다가 이어진다. 문도대표로 월정사 회주 현해 스님이 헌다하고 손상좌, 증손상좌 스님, 주지스님, 내빈 스님, 일반 내빈, 대중스님, 산내 비구니 암자(지장암,육수암) 주지스님·대중스님, 일반 내빈과 신도들이 헌화·헌다를 한다. 입정, 한암 스님 법어 ‘일생패궐’ 낭독, 파산게 후 대중삼배, 주지 스님 인사말 등으로 진행된다. 한암스님은 1876년 화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한암(漢岩), 이름은 중원(重遠), 본관은 온양이다. 1910년 봄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보임(保任)중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으니 서른다섯 되던 겨울이었다. 쉰이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 오대산에 들어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와 나무가 되니 중대 앞의 단풍나무가 그것이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1·4후퇴 때 월정사와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후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하자 한암 스님은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은 나의 도리이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하며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상원사와 국보 상원사 동종을 지켜낸 것이다. 한암스님은 이야기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발록(一鉢錄)’한 권을 남겼는데 그마저 1947년 봄, 상원사에 불이 났을 때 타고 말았다. 이 책은 뒤에 1995년 월정사 주지 현해 스님이 문도들의 뜻을 모아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으로 재간행했다. 제자로는 보문(普門), 난암(煖岩), 탄허(呑虛) 등이 있으며, 한암스님은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한 1951년까지 27년간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이동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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