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近代불교 두 스승을 다시 돌아보다(조선일보)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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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4-18 11:22 조회8,703회 댓글0건본문
석전·한암 스님 조명하는 학술대회… 선운사·월정사 공동 주최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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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 불교의 교(敎)와 선(禪)을 대표하며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의 계율 확립에 애썼던 석전 스님(왼쪽)과 한암 스님. /한국불교학회 제공
석전(石顚·1870~1948) 스님과 한암(漢岩·1876~1951) 스님. 동시대를 살면서 각각 한국 근대불교에서 교(敎)와 선(禪)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대표적 큰 스승이다. 계율을 중시하며 일제강점기 결혼과 육식 등으로 흐트러진 한국 불교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선 것도 닮은꼴이다. 두 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조명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18일 낮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린다. 이 학술대회는 특히 한국불교학회(회장 김용표)와 함께 조계종 제24교구본사인 선운사(주지 법만 스님)와 제4교구본사인 월정사(주지 정념 스님)가 공동 주최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례적으로 두 교구본사가 함께 자리를 마련한 것은 석전 스님의 유지를 따르는 선운사의 문도(門徒)들과 월정사의 한암 스님 문도들이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속명인 박한영(朴漢永) 스님으로도 잘 알려진 석전 스님은 유불선(儒佛仙)과 선교율(禪敎律)에 두루 막힘이 없던 당대의 석학으로 만암 청담 운허 스님 등을지도했을 뿐 아니라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오세창 등 재가 인사들과도 학문적으로 막역하게 소통했다. 3000수에 이르는 한시(漢詩)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도 지냈다. 당대의 선승이었던 한암 스님의 승려 교육과 후학 지도는 철저히 절집안에서 이뤄졌다. 서울 봉은사 조실(祖室)이던 1925년 "내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추는 학(鶴)이 될지언정, 봄날에 말 잘하는 앵무새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며 오대산으로 들어가 평생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특히 1·4후퇴 때 상원사를 불태우려는 국군의 작전에 대해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하고 나는 절을 지켜야 하니 이제 불을 붙이라"고 하자 군인들이 문짝 하나만 불태우고 감으로써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가 유명하다.
18일 학술대회에서는 조성택(고려대) 신규탁(연세대) 김광식 고영섭 교수(이상 동국대)와 자현(월정사) 정도(조계종 교육부장) 법상(조계종 포교연구실장) 혜명(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스님 등 10명이 주제 발표를 한다.
속명인 박한영(朴漢永) 스님으로도 잘 알려진 석전 스님은 유불선(儒佛仙)과 선교율(禪敎律)에 두루 막힘이 없던 당대의 석학으로 만암 청담 운허 스님 등을지도했을 뿐 아니라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오세창 등 재가 인사들과도 학문적으로 막역하게 소통했다. 3000수에 이르는 한시(漢詩)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도 지냈다. 당대의 선승이었던 한암 스님의 승려 교육과 후학 지도는 철저히 절집안에서 이뤄졌다. 서울 봉은사 조실(祖室)이던 1925년 "내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추는 학(鶴)이 될지언정, 봄날에 말 잘하는 앵무새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며 오대산으로 들어가 평생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특히 1·4후퇴 때 상원사를 불태우려는 국군의 작전에 대해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하고 나는 절을 지켜야 하니 이제 불을 붙이라"고 하자 군인들이 문짝 하나만 불태우고 감으로써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가 유명하다.
18일 학술대회에서는 조성택(고려대) 신규탁(연세대) 김광식 고영섭 교수(이상 동국대)와 자현(월정사) 정도(조계종 교육부장) 법상(조계종 포교연구실장) 혜명(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스님 등 10명이 주제 발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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