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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옥 교수의 한국선 이야기] 16. 해우소 갈 때도 화두 성성했던 선사 (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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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2-08-28 09:29 조회2,3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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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보문 선사의 구도 수행 4

걸어갈 때도 일할 때도 삼매 들어
선정들어 돌부리 걸려 넘어지기도
오대산 오르내리며 오도송 읊어내
깨달음 인정받고 ‘자운’ 법호 받아

9. 화두 삼매
한암(漢巖, 1876∼1951) 가풍은 참선은 물론 다른 공부와 의례도 함께 닦았다. 한암은 “중이 되어 다섯 가지에 참여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다”라며 참선, 간경, 염불, 의식, 포교 등 승가오칙을 만들어 실천하게 했다. 한암은 아침 공양을 마치면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가르쳤고, 탄허도 그 뜻을 받들어 간경 교학을 도맡았다. 보문은 참선 자리의 중심에 앉았다. 이에 대해 한암은 “내 상좌 가운데 선에 대한 지견이 투철한 사람은 보문뿐이다”라고 인정했다.

보문은 수행의 기록을 스스로 남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기록하는 것도 막았기에 그가 어떤 수행법으로 수행했는지, 화두 수행을 했다면 어떤 화두를 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한암이 도문(道文, 1935~ )에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화두를 주었다니 보문에게도 그랬을 가능성이 있지만, 달리 볼 수도 있겠다.

봉암사결사 때 입승 소임자를 결정하기 위해 무자 화두를 놓고 법거량을 했는데, 보문의 소견이 수승해서 모두들 보문을 입승으로 추대했다는 증언이 있다. 또 보문이 대구 보현사에 주석할 때 신도가 달마도를 그려 와서 화제(츐題)를 부탁하면 ‘무(無)’자 한 글자만 써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보문이 무자화두를 들고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보문은 화두 수행을 시작하면서 금방 삼매를 이루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두 일화가 전한다. 보문이 상원사로 올라오는 신도들을 마중하러 내려가면서 화두일념으로 삼매에 들어갔음을 전해주는 일화가 있다. 보문은 관대걸이[세조가 개울 목욕을 하여 피부병이 나았는데 그때 의복을 벗어 걸어놓은 곳]를 지나 월정 삼거리까지 내려가서 오래 기다렸지만 신도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훨씬 전에 상원사에 도착한 신도들은 벌써 불공을 마치고 하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매에 들어간 보문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신도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공양간 일을 할 때의 일화도 있다. 보문은 공양간 밥솥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선정에 들었다. 주지 석상(石霜, 1872~1947)이 밥 타는 냄새를 맡고 달려와 불을 끄고 탄 밥을 퍼냈다. 선방 대중들에게 탄 밥을 주며 석상이 말했다. “너희에게는 이것도 과하다. 보문스님이 태워준 밥이니 아무 말도 말고 다 먹어라. 나도 탄 밥을 먹어야겠다” 타성에 젖어 앉아있기만 하던 선방 대중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이들 일화는 보문이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화두가 성성하게 들리는 경지] 너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보문은 걸어갈 때도 앉아서 일할 때도 삼매에 들었다. 일찍이 혜능은 ‘일행삼매(一行三昧)’와 ‘통류(通流)’를 가르쳤다. 걸어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언제나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일행삼매를 확립하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통류를 강조했다.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나니[通流]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바로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바로 속박되는 것이라고 했다. 외형이나 바깥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라는 〈원각경〉의 가르침과도 부합한다. 그리고 구차제정[九次第定, 초선정(初禪定)~사선정(四禪定),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멸진정(滅盡定)]에서도 삼매에서 시작되는 이선정은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사라지는 멸진정으로 귀결된다. 삼매는 문득 깨달음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이렇게 구차제정 대장정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보문은 막 수행을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든든한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보문은 화두수행을 시작하면서 금방 삼매를 이루었다. 일주일 남짓 만에 일차견성을 이루었다. 사진은 수좌의 참선 모습.

10. 용맹정진과 견성
보문은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용맹정진에 동참한다. 지암(智庵, 1884~1969)이 은사 한암을 위하여 상원사 영산전 자리에 ‘ㄷ’자형의 집을 지었는데 한암은 그 집을 다른 용도로 쓰라며 스스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수좌들은 그 집에서 용맹정진하기로 원을 세웠다. 현칙, 동성, 도성, 경우 등 30여 명이 동참했고 보문도 말석에 앉을 수 있었다. 이들은 90일간 용맹정진을 결의하면서 맹세했다. 첫째, 90일간 잠을 자지 않는다. 둘째, 중도에 포기하면 다시는 오대산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 셋째, 수행 중에 죽으면 시신을 눈 속에 두었다가 90일이 지난 뒤에 장례를 치른다.

절반 이상이 중도에 포기했지만 보문은 흐트러짐 없이 수행에 몰입했다. 더 성성하게 화두를 들기 위해서 아예 툇마루로 나가 살을 에는 오대산 겨울바람을 맞으며 앉기도 했다. 어느 날, 보문은 해우소로 가고 있었다. 해우소로 가는 길에도 보문의 화두는 끊어지지 않고 성성했다. ‘나’와 ‘세계’는 이미 사라져 화두만 남았다. 화두가 해우소로 걸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관대걸이를 지나 월정 삼거리까지 갈 때의 화두보다 더 성성하고 적적했다. 그러다 보문은 돌부리에 부딪혀 넘어져 뒹굴었다. 발가락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가슴을 모난 바위에 심하게 부딪혔다. 사라졌던 내가 되살아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심안’이 열리는 ‘일차 견성’을 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물음에 ‘무’라고 대답한 도리가 얼음 녹듯 풀렸고 온 세상이 훤히 밝아오는 경험을 하였다.

한암의 제자이며 보문의 사제인 비룡(飛龍, 1901∼2000)은 이때가 보문이 출가한 지 일주일 남짓 된 때라고 증언한다. 비슷한 상황을 당나라 현사(玄沙, 835~908)에게서 찾을 수 있다. 현사는 스승 설봉이 “제방을 행각하라”고 명하여 속세로 나가던 중 돌부리에 차여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지르는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는 행각은 필요 없다며 그냥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보문은 포행을 하거나 땔감을 마련한다고 오대산 자락을 오르내리며 오도송(悟道頌)을 쩌렁쩌렁 읊었다. 넘쳐나는 기운을 주체할 수 없어 산속을 헤매기도 했다. 오대산은 겨울에 눈이 두껍게 쌓이기에 눈 속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워 위험했다. 그냥 놓아두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다고 걱정한 수좌들이 보문을 한암에게 데려갔다. 그러자 보문이 은사 앞에서 오도송을 읊었다.

“땅을 차고 넘어진 나와 대지가 공하니/ 일만 문수도 전도상을 보이도다/ 푸르고 차가운 봉우리 끝에 둥근달 걸리니/ 달빛 맑은 허공이 한 물건 안에 들었네(蹴地[원문에는 ‘築指’로 표기됨]倒余大地空, 一萬文殊顚倒相, 碧寒峰頭月一輪, 照耀淸空一物中)” (일타, 〈평창 월정사 보문당 현로대선사비문〉)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되어 공하고, ‘한 물건’ 그 자체로 갈무리된 경지를 보였다. 한암이 보고 크게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힘을 실어주었다. “마당 가운데 보물 나무[극락정토에 일곱 줄로 서 있는 나무] 자라났으니/ 보문 고불당[옛 부처님. 오래된 불상. 덕 높은 스님]이로다/ 오늘부터 오묘한 길[玄路. 보문이 출가 후 받은 법명]로 가서/ 뭇 중생들을 가르쳐 인도하라(庭中寶樹生, 普門古佛堂, 從此玄路去, 開示諸群生)”

한암은 이렇게 보문의 깨달음의 경지를 인가하고 자운(慈雲)이란 법호를 내렸다. 보문은 그 뒤로는 오도송을 읊지 않고 조용히 더 치열하게 정진을 이어갔다.

11. 마취 없는 대수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설들이 생겨났다. 해우소로 가다 넘어져 깨달아 인가를 받은 것이 며칠 만에 이뤄진 일이듯, 보문이 육신의 병을 얻게 된 것도 짧은 시일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문이 앓게 된 병은 결핵, 늑막염, 갈비뼈 종양 등으로 전해진다. 어떤 병이라고 하든 전설 간 공통되는 부분은 갈비뼈 3개를 잘라내는 수술을 마취 없이 받는다는 것이다. 마취를 하지 않는 이유도 전설 간 차이가 있으니 돈이 모자라서라든가 병원에 마취약 없어서라든가 보문 스스로가 마취를 거부했다든가 등으로 설명한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보문은 마취를 하지 않고 갈비뼈 3개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는다.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보문은 완전한 화두삼매에 들어간 시점에서 수술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 갈비뼈를 거의 다 잘라내어 가는 순간 화두를 놓치게 되어 엄청난 고통을 경험한다. 보문은 자기 공부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인정하고 깊이 반성했다. 수중에 3일간의 입원비밖에 없었던 그는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도 3일째 되는 날 밤에 몰래 병원을 빠져나왔다.

이 사실은 집도의를 크게 감동시켜 불자가 되게 했고, 밖으로 퍼져나간 소문은 화두 수행의 위대함을 중생들이 인정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보문을 탁월한 도인의 모습으로 널리 알렸다. 그렇지만 무리한 수술을 하고 난 뒤 일정한 기간 동안 온전한 치료를 받지 않은 탓에 보문의 건강은 수술 후 더 나빠지게 되었다.

갈비뼈에 병이 생긴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가 해우소로 가다 넘어진 것 말고는 특별한 외상을 입은 일이 없었으니 그때 넘어진 충격으로 상처를 입은 것이 발병에 직접적 영향을 준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해우소로 가는 길의 돌부리는 보문을 깨닫게 해주었으면서도 위대한 선승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병을 유발했다. 그러니 ‘그 일’은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했으며,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돌부리는 좋고 나쁘다는 분별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중도를 완전하게 가르친 것이다.

▶한줄요약
보문은 출가한 지 일주일 남짓 됐을 때 ‘일차 견성’을 했다. ‘무자 화두’가 얼음 녹듯 풀리고 온 세상이 훤히 밝아오는 경험을 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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