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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을 불태우기 전에 나부터 죽여라"(노컷뉴스)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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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4-11 10:31 조회9,1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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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을 불태우기 전에 나부터 죽여라"

  • 2014-04-11 10:02
  • 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⑮]전쟁이 빚은 참화 속에서 민족의 문화재 살아남다

오대산 월정사의 옛 모습. <조선사찰 31본사 사진첩>(1929년)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눌와 제공)
◈ 잿더미로 변한 월정사…큰 스님이 몸으로 지킨 상원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의 강원도.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국군 제1군단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찰을 포함한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

산속에 있는 민가나 절이 적의 은폐물이나 보급기지로 활용될 가능성을 없애려는 가혹한 조치였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의 스님과 신도들은 북한군이나 인민군이 주둔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국군이 태우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절 건물의 방구들을 파내고 모든 문짝을 뜯어냈다.

마침내 국군이 들이닥쳤다.

이들도 천년고찰을 제 손으로 태우려니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민간인들을 시켜 잿더미로 만들었다.

월정사는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만 남고 폐허로 변했다.

오대산 상원사.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월정사의 말사로 월정사를 지나 올라가다보면 산 중턱에서 만나게 된다. (사진=사진작가 김성철 제공)
국군은 이어 오대산 중턱에 있는 상원사로 몰려갔다.

당시 오대산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을 가고, 한국불교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되는 한암스님만 상원사에 남아 있었다.

상원사로 들어온 군인들은 법당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만 시간을 주게"라고 이르고는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입은 뒤 법당 안에 있는 불상 앞에 정좌했다.

그리고는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이를 본 장교가 "스님~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밖으로 나오세요"라며 끌어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난 부처님의 제자야. 중이란 원래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는 여기서 힘 안들이고 저절로 화장을 할 터이니 당신들은 명령대로 어서 불을 지르게"

스님의 기개에 압도당한 군인들은 결국 법당의 문짝만 뜯어내 불을 태운 뒤 떠났다.

상원사는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며,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 동종(국보 제36호)을 보관하고 있었다.

◈ "화엄사를 불에 태워라"…"안된다~ 문짝만 소각하라"
화엄사 전경. (사진=사진작가 김성철 제공)
1951년 5월 지리산.

빨치산 주축부대인 남부군을 토벌하던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은 고민에 빠졌다.

상부에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곡사 등 인근 사찰들은 모두 공비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불길에 휩싸였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절을 태우는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전쟁 중이라지만 화엄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고, 더구나 각황전은 그의 어머니의 기도처였다.

차일혁은 1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화엄사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각황전 문짝들을 모두 떼어와 대웅전 앞에 쌓아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절을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를 어길 순 없다. 문짝을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이행한 것이다"

이로써 화엄사 전각들은 무사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화엄사를 지키고 1년 후 다시 사찰을 찾은 차일혁
이런 조치 때문에 차일혁은 작전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2년 후 차일혁 부대는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해 빨치산 토벌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적장의 예를 최대한 갖춰 그의 시신을 스님들의 독경 속에 정중하게 화장한 후 하동 송림에 뿌리며 장례를 치렀다.

이런 일들로 차일혁은 승진도 늦어지고 수많은 공훈에도 불구하고 훈장도 받지 못했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은 그에게 감사장을 수여했고, 조계종은 1998년 6월에 화엄사 경내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이 비석에 고은 시인은 글을 새겼다.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 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

◈ "해인사를 폭격하라~" VS "해인사 주변에만 기관총을 갈겨라"

해인사 경내에 세워진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 (사진=해인사 제공)
경남 합천에 있는 해인사에 들어가면 올라가는 길목에 거대한 비석이 나타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다.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공기가 잘 순환되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 이 곳에는 8만 1,258장의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돼 있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1951년 12월, 지리산 일대에는 한창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환 대령이 지휘하는 한국 공군의 유일한 전투비행대인 제10 전투비행전대는 공비토벌작전에 항공지원을 맡고 있었다.

미 공군은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정찰기와 연락장교를 파견해 한국 공군기가 작전하기 전에 미리 지상의 동향과 공격 목표를 지정해주고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 전투비행대에 출격명령이 내려졌다.

공비를 토벌하는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4대의 비행기가 사천 비행장을 출발해 지리산으로 향했다.

비행기마다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와 5인치 로케트탄 6개, 캘리버 50 기관총 1.800발씩을 장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해인사 마당에 떨어져 하얀 연막을 내고 있었다.

이때 김영환 편대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내 뒤를 따르되 편대장 지시 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사격하라"

잠시 후 정찰기에서 독촉 훈령이 내려왔다.

"해인사를 폭탄으로 공격하라~ 도대체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나?"

편대장의 2차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폭탄 공격을 하지 말라~"

4대의 비행기는 해인사를 지나쳐 뒷산 능선 너머에서 폭탄과 로케트탄을 빨치산들에게 퍼부었다.

그날 저녁, 미 공군 고문단의 한 소령이 편대장실에 나타났다.

그는 김영환 대장에게 물었다.

"아까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소령께서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정했지만 그 곳은 사찰이었습니다"
"사찰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공비보다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세계적인 국보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미군도 2차대전 때 귀중한 문화재가 많은 교토시를 폭격 대상에서 제외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말문이 막힌 미군 장교는 돌아가버렸다.

빨간 마후라의 표상 김영환 장군.1954년 비행기 사고로 34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RELNEWS:right}이렇게 해서 천년고찰 해인사와 장경판전, 고려대장경판은 우리 곁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 일화를 알게된 해인사는 2002년에 높이 2.2m 높이에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본떠 오석과 황동석으로 제작한 공적비를 해인사 마당에 세웠다.

큰 스님이 상원사에 없었다면, 차일혁과 김영환 두 분이 상부의 명령을 따랐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는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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