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환수 가능성 높아져(법보신문) 201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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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12-04 08:46 조회8,771회 댓글0건본문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환수 가능성 높아져 | ||||||||||||||||||
군산 동국사,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 기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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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일본에서 환수된 ‘조선왕조실록’을 원 소장처인 오대산 사고로 되돌리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월정사로 돌아왔다. 일제의 강탈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 원본을 소장 중이던 군산 동국사가 월정사에 이를 기증한 것. 군산 동국사(주지 종걸 스님)는 12월3일 대웅전에서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 원본을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에게 전했다.
일제 강탈 과정 담긴 기록 돌아와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 군산 동국사, 3일 월정사에 기증
소화 6(1931)년에 작성된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이하 취지서)’는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강탈 경위를 밝히고 있다. ‘취지서’에 따르면 “1914년, 정부(총독부)의 명에 의해 동경으로 이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총독 사이토 마토(齋藤實)가 서명하기도 했다.
‘월정사 사적기’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1914년 3월3일, 총독부 소속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桶口)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趙秉璇) 등이 와서 본사(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史冊) 150 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동경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그때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됐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役事)를 끝냈다”고 ‘사적기’는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취지서’에는 월정사 창건유래 및 중수, 적멸보궁 중수 기록이 담겨 있다. 월정사 변화양상을 살피는 중요자료인 셈이다. ‘취지서’에 의하면 ‘석존정골사리탑묘찬앙회’는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오대산 중대사자암에 있는 진신사리탑을 정비하기 위해 1931년 1월 결성된 단체다. 찬앙회는 막대한 빚으로 허덕이는 월정사를 구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취지서’는 단체의 취지, 규약, 발기인, 찬성자 명단, 임원 등도 실려 있다.
발기인은 ‘교정 박한영’을 비롯해 방한암 외 53인, 임원은 회장 중추원부의장 후작 박영효, 법주 교정 방한암, 평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 등 총 45인이다. 찬성자는 조선총독 자작 재등실(齋藤實)과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육당 최남선, 중추원 참의 남작 박기양, 평남지사 원전관(園田寬) 등 138인으로 당대 정재계는 물론 학계, 언론계, 불교계 등 사부대중이 대거 동참했다.
당초 ‘취지서’는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이 조선불교 초대 교정 석적 반한영 스님 일생록을 집필하기 위한 기본 자료로 활용할 목적이었다. 2012년 겨울 경매에 나온 자료를 낙찰 받아 확인한 결과 월정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록임을 깨달았다. 스님은 조길문 중앙승가대 교수 권유로 월정사 기증을 결정했다. 스님은 소장하고 있던 일제강점기 월정사 관련 원본 사진도 기증했다. 종걸 스님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본래 있던 자리인 오대산 월정사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총독부는 ‘조선왕조실록’을 인근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주문진 선착장까지 등짐과 달구지로 운반한 뒤 배로 실어 갔다”고 덧붙였다. 이날 동국사를 찾은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취지서’를 받고 기증서와 수령증에 종걸 스님과 각각 서명했다. 정념 스님은 “종걸 스님 노력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된 귀중한 유물인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가 월정사로 돌아오게 되어 기쁘다”며 “‘취지서’에도 언급되어 있듯 규장각과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과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가 제자리인 오대산으로 돌아오는 귀중한 첫 걸음”이라고 감사함을 전했다. 신용훈 전북주재기자 boori13@beop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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