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숲 법문, 낮게 더 낮게 작게 더 작게…(한겨레) 201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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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8-27 08:49 조회8,719회 댓글0건본문
전나무숲 법문, 낮게 더 낮게 작게 더 작게… | |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미시세계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작은 생명들은 저를 내어주는 게 제 삶을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거기엔 인간이 추구하는 진선미 모든 가치가 있습니다. 그 생명들이 그렇게 살아온 결과가 저 전나무숲입니다.”
시인들은 한탄하곤 했다. “… 흘러가는 것이 어디 강물뿐인가/ 당신도 내 곁에 머물지 못하고/ 하늘로 하늘로 오른 것을…”(하옥이 ‘바람이 남긴 지문’에서) 시간의 강 속에 떠내려간 꿈을 슬퍼한 이는 더 많았다. “… 그들과 함께 떠돌고 싶었던 꿈이/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너 강물로 흐른다// 아 어찌 흐르는 것이 강물뿐이랴/ 강물 속 노을도 흐르고/ 나도 이렇게 따라 흐르거늘”(정파 김미외의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하지만 그건 시인들의 오해였다.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저 낮고 낮은 곳으로 흘러 더 낮게 스미는, 그런 삶을 누가 감히 시도나 할 것인가. 시간의 흐름만 안타까워하고, 시간에 따른 소멸만 연민했을 뿐. 떠내려가는 줄 알면서도 거슬러 오르려 하는 게 사람. 그들은 물길 따라 계곡으로, 계곡 따라 산정까지 오르려 한다. 앞다퉈 높이를 찬향하고, 더 높은 것을 소망하며, 높은 곳에서 굽어보기를 갈망한다. 월정사 전나무숲, 그 적멸의 공간에서도 키 큰 나무의 높이만 헤아린다. 가장 큰 나무가 30m였다지? 그러다 보면 숲길이 끝날 즈음엔 목이 뻣뻣하다.
오죽하면 숲길 중간에 “여기 숲을 지키는 우리들 이끼도 있어요. 아래도 봐주세요”라는 내용의 식생 안내판을 세워두었을까. 그 가냘픈 호소가 떠오른 것도 실은 숲길이 끝나는 곳, 금강연 깊이 제 그림자 빠뜨린 청류다원에서 차 한잔의 침묵이 끝날 때쯤이었다.
“미시세계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작은 생명들은 저를 내어주는 게 제 삶을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무수한 생명들이 말없이 낮게 더 낮게 스며드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감동적이죠. 거기엔 인간이 추구하는 진선미 모든 가치가 있습니다. 그 생명들이 그렇게 살아온 결과가 저 전나무숲입니다. 사람들은 늘씬하고 웅장한 키 큰 나무들만 볼 뿐, 키 큰 나무 밑 생명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무상의 법문이 거기에 있는데….”
금강연을 지나 숲 가장자리를 적시며 흐르는 물길, 물길 옆 습지, 습지 바위에 옷을 입힌 지의류, 숲 속 돌들을 파랗게 덮은 이끼, 그리고 풀과 풀, 키 작은 나무와 나무. 그 숲 땅속을 기는 지렁이, 진드기, 응애, 굼벵이, 땅 위의 도마뱀, 지네, 풍뎅이, 사슴벌레, 귀뚜라미, 여치, 개구리, 쥐, 뱀 그리고 나무 사이를 나는 박새, 개똥지빠귀, 참새, 할미새, 딱따구리, 물총새, 호반새, 뻐꾸기, 부엉이 그리고 하늘을 찌르는 참나무, 소나무, 전나무. 그 장대한 숲을 이루게 하는 것은 땅속 혹은 땅 위를 기는 바로 그 생명들이다.
근세 선풍의 우뚝한 봉우리, 한암 선사의 법제자라고 그렇게 낮고 작아질 수 있을까. 10년, 20년 바윗덩어리처럼 선방을 지킨들, 그렇게 가난할까. 아니 그러하지 못하기에 지난 한철도 절 밥을 축내고, 다음 한철을 기약하는 것 아닌가. “향엄지한 선사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올해의 가난이야말로 참 가난이라네/ 지난해는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었으나/ 올해의 가난은 꽂을 송곳마저 없다네.(去年貧末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無卓錐之地 今年錐也無)’ 수행자들의 영원한 꿈이죠.”
단기 출가자들이 숲에서 3보1배로 입산의 첫발을 떼는 것도 실은 그런 숲의 법문을 몸에 새기라는 것이었다. 절이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 삭발탑 아래서 세속의 인연을 잠시 털어내고, 그러한 절로써 절에 들라는 것이었다. 백배, 천배를 하다 보면 혹시 저의 눈높이가 이끼와 같아지고, 저의 마음은 저 땅속 작은 생명처럼 가난해지지 않을까?
수좌들과 함께 한철 공부를 마친 정념 주지스님은 해제 날 마침 쏟아지는 비를 보며 이렇게 인사했다. “저 비가 산하에는 감로수이겠지만, 세상에는 마르지 않는 눈물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세상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니, 그와 같이 세상 속에 스며들기 바랍니다.” 해제 기간 속도와 높이만을 추구하는 세상에 나아가 물처럼 낮게, 저 작은 생명처럼 더 깊이 헌신하라는 것일 터.
흙은 광물질 45%, 수분 25%, 공기 25%, 그리고 유기물질 5%로 이루어져 있다. 손에 잡히는 그런 흙 한줌엔 지구상의 인간만큼이나 많은 작은 생명이 산다. 건강한 숲 풀뿌리에 붙은 흙 1g엔 세균이 4천~5천종, 10억여마리가 산다. 숲 속의 버섯 등 곰팡이류는 1천종에 이르고, 원생동물, 선충류 등 미소동물이 미생물에 의지해 산다. 지의류와 이끼류가 미생물, 미소동물 덕택에 살아가고, 그 위에서 버섯이 자라고 풀과 나무가 자란다.
월정사 전나무가 100년, 200년, 심지어 600년 가까이 살며, 하늘 높이 치솟을 수 있는 건 그 튼튼한 작은 생명의 그물망 덕이다. 침엽수림에서는 다른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지만, 이곳 토양은 워낙 건강해 모든 생명들이 잘도 자란다.
미생물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숲 속의 분해자. 미생물이 재자연화의 첫 공정을 맡는다면, 버섯은 생태계 청소의 최고 일꾼. 쓰러진 나무나 낙엽, 죽었거나 약해진 동식물의 무기물질을 분해해 무기양분으로 만드는 장인이다. 스스로 양분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식물 뿌리에서 당이나 질산염을 얻어 생활하고, 대신 식물 뿌리를 가뭄과 병균으로부터 보호하고, 무기양분을 제공한다. 지의류는 바위 등 척박한 곳에 달라붙어 특수 화학물질로 바위 면을 가루로 만들고, 무기염류를 추출해내는 토양의 개척자. 대기의 독성물질을 흡수해 고정시키기도 한다. 이끼는 제 몸무게의 5배나 되는 수분을 저장하며, 오랜 가뭄 속에서도 숲 속 이웃들에게 수분을 공급해주는 숲 속의 초록댐이다. 고산 습지의 이탄이끼는 제 몸무게의 25배까지 물을 저장한다. 다량의 탄소와 메탄가스를 그 몸속에 담고 있어 지구 온난화의 방파제 노릇도 한다. 1㎡에 1천여마리가 산다는 지렁이는 땅속 최고의 농부. 하루에 제 몸무게의 36배나 되는 흙과 풀과 나무 부스러기를 먹어치우고, 그만큼 기름진 똥을 세상에 내놓는다.
월정사 전나무가 100년, 200년, 심지어 600년 가까이 살며, 하늘 높이 치솟을 수 있는 건 그 튼튼한 작은 생명의 그물망 덕이다. 지금 소나무, 참나무가 전나무와 높이를 경쟁하고 단풍, 고로쇠, 다릅나무, 복자기, 층층나무, 물푸레 등이 숲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도 그 덕택이다. 큰뱀무, 고마리, 멸가치, 여뀌, 여우오줌, 노루오줌, 짚신나물, 오리방풀, 개시호, 영아자, 파리풀, 관중, 투구꽃 등 500여종의 풀이 땅을 덮고 있는 것도 그들 덕분이다. 진달래, 생강나무, 매화말발도리, 물참대, 참싸리, 붉은병꽃나무, 나래회나무, 산철쭉 등 작은큰키나무들이 숲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어, 큰키나무들이 비바람에 뽑히거나 부러지는 것을 막아준다.
침엽수림에서는 다른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지만, 이곳 토양은 워낙 건강해 모든 생명들이 잘도 자란다. 반면 주변의 땅 밑 작은 생물의 네트워크가 빈약한 광릉 전나무숲은 위험에 처해 있다. 80여년 전 오대산 씨를 발아해 심었지만, 건강한 전나무 수령(600년)의 8분의 1도 채우지 못하고 쓰러지고 꺾어진다.
숲 지킴이 차윤정 선생은 월정사 전나무숲을 보며 이렇게 충고했다. “숲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저 작은 생명과 숲이 베푸는 연회에서 얌전히 즐기면 됩니다. 그저 기쁨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적멸의 바다. 인위적인 진동을 교란하고 흡수해버린다. 그 적정을 채우는 것은 청정. 나뭇잎 100㎡가 한나절에 생산하는 산소는 성인 40명의 1일 소비량. 나뭇잎의 무수한 솜털은 공기 중 미세물질을 흡착해 숲은 언제나 맑고 투명하다. 게다가 그저 그윽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향기. 방사선균까지도 알싸한 내음을 선사한다. 오대천 물은 음이온을 뿌려 신경을 안정시키고, 나무에서 분비하는 각종 테르펜은 몸의 병을 씻어준다. 평화다.
설악산 호랑이 오현 스님은 이렇게 고백했다.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아득한 성자’ 전문) 선방이 달리 있을까? 저 작은 생명들이 스승이고 법문인걸.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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