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눈부신 여름날 , 상원사 아래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원일보)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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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7-17 08:54 조회8,703회 댓글0건본문
햇살 눈부신 여름날 , 상원사 아래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김도연 소설가와 함께 한암 스님 만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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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이 오대산 월정사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은 단풍나무 지팡이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 나무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중대 사자암. 평창=오윤석기자 |
[역사속의 강원인물]햇살 눈부신 여름날 , 상원사 아래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찾아간 오대산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오대산인(五臺山人) 한암스님을 만나러 가는 이번 탐방은 떠나기에 앞서 미리 노정부터 거창하게 잡았다. 시인 이홍섭도 대관령을 넘어와 동행하기로 한 터라 제대로 된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한암스님이 오대산에 들어와 27년 동안 산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때 경향 각지에서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을…. 점심공양을 마친 지장암 스님들은 나무 그림자 선명한 길을 걷고 있었다 초록의 잎들이 온 산에서 용맹정진하느라 열기를 토해냈다 스님이 꽂아놓은 단풍나무 지팡이가 싹을 틔워 정자를 이뤘다는 `중대' 그 나무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물으니 건물을 중창하는 도중에 손상을 입고 사라졌다고 한다 적멸보궁 뜰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자리는 허공에서 한가로웠고 흰나비는 나무 사이로 날아갔다 목탁과 염불소리는 그 뒤를 쫓아갔다 다시 찾아간 오대산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오대산인(五臺山人) 한암스님을 만나러 가는 이번 탐방은 떠나기에 앞서 미리 노정부터 거창하게 잡았다. 시인 이홍섭도 대관령을 넘어와 동행하기로 한 터라 제대로 된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한암스님이 오대산에 들어와 27년 동안 산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때 경향 각지에서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을 …. 한암스님은 1925년 오대산으로 들어와 전쟁 중이던 1951년 상원사에서 좌선하는 자세로 열반에 들었는데, 그 시절 오대산으로, 더욱이 월정사도 아닌 상원사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길임에 틀림없었다. 서울에서부터 며칠을 걸어서 오는 이도 있었고 아니면 기차를 타고 원주나 제천까지 와 거기서 진부까지는 화물트럭을 얻어 타야만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대산 입구 월정거리까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면 다시 걷거나 운이 좋으면 산판트럭을 타고 월정사까지 갈 수 있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 구간은 목재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좁은 철로를 이용해 오직 걷는 방법밖에 없었다. 철로라 했지만 기관차가 다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밀어야만 움직이는 밀차가 다니는 철로였다. 하여튼, 사진기자와 시인, 소설가 이렇게 셋이서 월정사 전나무 숲에서부터 월정사, 부도거리, 회사거리, 오대천 계곡, 상원사까지 이어진 선재길을 걸어서 한암스님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스님이 반갑게 맞아줄 것 같았다. 어느 날 당돌한 여자아이가 한암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몇 살이노?” “열네 살입니다.” “그래 여기는 어찌 왔노?” “절에 가서 밥 세 번 얻어먹으면 안 아프고 오래 산다고 해서 왔습니다.” “내가 영원히 안 아픈 법을 가르쳐줄까?” 그 말에 눈을 반짝 뜬 여자아이를 노스님이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네 눈빛을 보니 너는 가지 말고 여기서 살아야겠다.” 결국 그 여자아이는 노스님에게 계를 받고 지장암으로 출가를 했다. 계를 받을 때 여자아이는 노스님에게 투정을 부렸다. “큰스님! 그만 꿇어앉으라고 하세요. 다리가 저려서 너무 힘들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꿇어앉으면 얼마나 발이 저리고 아프겠냐. 편히 앉아라.” 지금 대구 서봉사에 있는 경희 스님의 일화인데 읽는 동안 내 입은 절로 벌어졌다. 한암스님의 어떤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서릿발 같은 일화도 당연히 있다. 스승인 경허화상 행장을 1931년에 썼는데 그 행장의 어느 부분이 글을 부탁한 만공스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폐기되고 말았다. 간략하게 인용하자면 `경허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못하니……'와 관련된 부분 때문일 것이다(이 부분은 아직도 논란이 식지 않고 있다). 훗날 만공스님은 상원사로 찾아와 며칠을 머물다가 떠날 때 갑자기 한암스님을 부르더니 그 앞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그러자 한암스님은 그 돌멩이가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주워 계곡으로 던져버리곤 쏜살같이 상원사로 돌아갔는데 눈에서 불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고 현장에 있었던 스님들은 전했다. 만공스님은 이렇게 한 마디 던졌다. “이번 걸음은 손해가 많네.” 물론 이 일화가 스승의 행적을 놓고 당대의 고승이 보인 입장차이의 표현인지 아니면 고도의 선문답인지는 나의 밑천으로는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한암스님의 또 다른 추상같은 면모에 모골이 송연해질 뿐이다. 우리는 원래의 길을 걷지 못했다. 오기로 했던 시인은 눈치를 챘는지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고 햇볕 또한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월정사 종무실장을 만나 냉커피를 얻어 마시고 책 몇 권을 구한 뒤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점심공양을 마친 지장암 스님들은 햇살과 나무 그림자가 더없이 선명한 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초록의 잎들이 온 산에서 용맹정진하느라 열기를 훅훅 토해냈다. 오대산 계곡에는 한때 250여 호나 되는 민가가 있었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모두 철거되었다. 나무를 나르던 철길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쟁 때 탑과 석조보살상만 남기고 불탔던 월정사는 만화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지어졌다. 우리는 사라지고, 남고, 다시 지어진 그 풍경 속의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며 달렸다. 전쟁 때 홀로 남아 상원사를 지켰던 스님을 만나려고 골짜기 깊은 곳으로 차를 몰았다. 들어갔다가 스님에게 붙잡혀 머리를 깎고 눌러앉아 버릴지도 모를 길을.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을 한암일침록으로 읽은 나야 괜찮지만 예쁜 아내와 아기가 있는 오 기자는 꽤나 속상할 거라 생각하며. 사제 삼 대의 부도가 나란히 서 있는 상원사 아래에 도착했다. 만화 희찬, 탄허 택성, 그리고 한암스님. 스님은 24살이 되던 해에 금강산을 떠나 경상도 청암사에서 스승이 될 경허화상을 만나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형상 있는 것이 형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지라(금강경)' 이 말을 듣고 다시 깨닫는다. 나는 둥근 종 모양의 부도를 돌며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형상 있는 게 허망하다는 건 조금 느끼기는 하겠는데, 형상 있는 게 형상 있는 게 아님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이놈아, 적멸보궁에 가서 참배나 하고 와!” “날이 이렇게 더운데요?” 스님도 더운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우리는 계단을 올라 상원사로 향했다. 상원사는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문수전 앞 댓돌에 벗어놓은 보살의 털 코고무신엔 `청량화'란 글씨가 씌어 있었다. 뒤편 산자락에 서 있는 잣나무의 우듬지엔 만공스님과 주고받은 선문답에 나오는 그 잣송이들이 주렁주렁 열렸고 영산전 앞 파탑에 부조된 부처님은 눈, 코, 입, 귀의 형상을 스스로 지워가는 중이었다. 돌로 만든 고양이 두 마리를 지나 우리는 올라가야 할 산자락을 쳐다보았다. 중대를 지나 적멸보궁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가파른 산길이었다. 스님들은 뭘 물으면 꼭 빙 에둘러서 얘기하는 고약한 버릇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고상하게 선문답이라고 포장하는 것만 같았으나 어쩌랴, 스님이 부른 게 아니라 내가 애가 타서 산속으로 찾아온 것이니…… 다리가 아프고 온몸에서 땀이 솟겠지만 산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금강산에서 출가한 이후 스님은 청암사, 해인사, 통도사, 고향인 평북 맹산 우두암, 건봉사, 서울 봉은사를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왔다. 상원사에서의 스님을 회상하는 제자들의 글을 읽었는데 내 눈엔 법어나 선문답, 게송, 비문, 찬, 서문보다 이런 것들이 자꾸만 밟혔다. `스님은 아침공양 후에 틀니를 빼서 청소를 하는데 그릇에 틀니를 넣고 휘휘 씻어요. 그런 후에는 그 그릇에 담긴 음식찌꺼기와 밥알이 있으면 물과 함께 전부 잡숴요(창조스님).' `쌀 한 톨이라도 아껴야 한다. 쌀 한 톨에는 농부의 피땀이 담겨 있으며, 그 한 톨을 근수로 달면 일곱 근에 해당된다고 하셨어요. 전쟁 때 군인들이 상원사 계곡에 와서 밥을 먹으면 근처가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걸 보신 스님이 군인들이 버린 밥알을 다 주워서, 그것을 씻어서는 군인들이 보는 데서 당신이 전부 잡수셨어요(뇌묵스님).' 오 기자와 나는 땀을 바가지로 쏟아낸 뒤에야 중대에 도착했다. 중대에는 스님이 꽂아놓은 단풍나무 지팡이가 싹을 틔워 어느덧 정자를 이뤘다고 한암스님 비문에 적혀 있어 그 나무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물으니 건물을 중창하는 도중에 손상을 입고 사라졌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적멸보궁으로 향했다. 산길 옆에 설치해놓은 스피커에선 목탁소리와 함께 쉬지 않고 다라니가 흘러나왔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적멸보궁에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목탁과 염불도 박자를 잘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적멸보궁의 뜰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자리는 허공에서 한가로웠고 흰나비는 참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로 팔랑팔랑 날아갔다. 목탁소리와 염불소리는 그 뒤를 쫓아갔다. 염불을 하는 스님은 목이 아픈지 자주 기침을 했다. 불단 위 텅 빈 방석을 향을 향해 끊임없이 절을 하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바라보다가 나는 부도에서 스님에게 물었던 질문을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스님의 자전적 구도기의 제목은 일생패궐(一生敗闕)이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중얼거렸다. 이번 생은 크게 망했다. <끝> * 기사원문보기 http://www.kwnews.co.kr/nview.asp?s=601&aid=214071600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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