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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과 문화올림픽] ③오대산 유형문화유산(강원도민일보)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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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7-24 09:26 조회8,3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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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과 문화올림픽] ③오대산 유형문화유산
한국 불교 산 역사… ‘문화고장 평창’ 긍지
이동명
   
 
오대산은 국보 4점, 보물 5점, 중요 민속자료 1점 등을 품고 있는 ‘문화의 보고’이다. 국보인 상원사 동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시대 대표 석탑이며 상원사 문수전 목조문수동자좌상은 조선시대 조각예술의 백미이다. 상원사 중창권선문은 가장 오래된 한글서적이다. 청동, 돌, 나무, 종이 등 소재도 골고루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우리 문화의 긍지와 아픔을 함께 보여준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1970년대 탑 해체 복원 때 사리장엄구 발견
 
약왕보살
석탑 향해 무릎 꿇고 향 피우며 공양 좌상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문화재는 제자리에”… 93년만에 반쪽 귀환



■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약왕보살

팔각은 불교 실천수행의 기본인 팔정도를 상징한다. 팔정도를 걸어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탑을 보며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마음에 새긴다.

탑신은 각 층마다 좁아짐이 적고 아홉 층에 달해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느낌을 더해 준다. 오대산과 월정사 풍경 속에 탑이 있을 때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멋스럽다. 1970년대 탑이 해체 복원됐다. 이때 1층과 5층 탑신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불사리는 부처님의 진신과 진배없다. 즉 탑신 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것. 기단 전체가 연꽃대좌처럼 장식돼 부처님이 연꽃대좌 모양의 기단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탑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으고 향을 피우며 공양하는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모은 양손을 보면 무언가 쥔 듯한 모양으로 구멍이 뚫려있다. 좌상을 만들 당시에는 공양할 때 피우는 향이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사라져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됐다.

희견보살(약왕보살의 전생)이 자신의 양팔을 공양하는 듯한 모습이라 약왕보살로 불린다.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런데 희견보살은 몸으로 공양함만 못하다 하고 온갖 향유를 마시고 몸을 불살랐다. 그렇게 온 세계를 비추고 몸이 불 타는 것이 1200년이었다. 정덕국 왕자로 다시 태어난 희견보살은 8만4000의 사리탑을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7만2000년 동안 사리탑을 공양했다. 끝없는 정진력을 바탕으로 몸으로써 법공양(法供養)을 해 중생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약왕보살이 됐다. 그 약왕보살이 다시 돌 형상으로 월정사에 앉아있다. 보살좌상은 성보박물관에 모셨고 현재 탑 앞에 있는 보살은 복제품이다.


   
▲ 조선왕조실록_오대산사고본

■ 파란만장 조선왕조실록·의궤

2006년 7월 7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아시아나항공 편으로 2회에 걸쳐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93년만에 고국 귀환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오대산으로 오지는 못했다. 곧바로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사명대사가 물과 불과 바람의 삼재가 들지 않는다고 한 명당 중의 명당. 조선왕조실록은 오대산에서 300년간 안전하게 지켜졌다. 나라를 잃고 나자 명당의 기운으로도 강제반출을 막을 수 없었다. 1914년 어느날 ‘총독부 관원·평창군 서무주임 히쿠찌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대학으로 직행시켰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 타고 교수들이 대출해 갔던 74책만이 남았다. 1932년 이 중 27책을 경성제대(현 서울대)에 나눠 보관했다. 도쿄에 남았던 47책이 2006년 돌아온 것이다.

2006년 8월 11일 실록은 잠시 오대산에 왔다. 강원도민, 평창군민과 관광객, 신도들은 오대산사고와 월정사에서 열린 ‘환국고유제’ 거행을 지켜보며 귀향을 축하했다. 이날 한 주민은 “오대산 사고본은 오대산에 있어야 한다”고 외치며 실록을 향해 큰 절을 했다.

왕실의궤 오대산 사고본은 192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 궁내청에 기증한 80종 163책과 일본 궁내청이 구입한 ‘진찬의궤’ 1종 4책까지 81종 167책이다. 일본 왕실의 ‘소유품’을 되돌려 받는 것은 어려움이 있어 더욱 값진 도전이었다. 오대산 사고본 의궤는 2011년 12월 6일 환국했다. 문화재청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을 관리단체로 지정하고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토록 하고 있다.

실록과 의궤는 “문화재는 제 자리에”라는 유네스코 협약·권고에 따라 원래 자리인 오대산에 봉안돼야 한다고 강원도민들은 주장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이들 문화재와 그 문화재를 찾고 지키기 위해 애쓴 흔적들은 올림픽 때 ‘문화의 고장’ 평창의 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끝> 이동명 sunshine@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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