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불교서적으로 간주돼 평가절하됐다가 1927년 다시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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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아닌 고조선을 역사 시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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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이처럼 현재 한국 문화의 뿌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책이 조선 후기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책이 됐고, 1927년이 돼서야 외국에서 나온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만든 책을 겨우 볼 수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 비로소 한글 번역본이 나왔다. 그리고 일찍이 보물로 지정됐던 [삼국유사]는 근래에 국보로 승격됐다.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가 어떤 책이며, 왜 조선 후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책이 됐는지 그 사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유사]에는 일연의 제자가 쓴 글도 몇 개 섞여 있어서 저자에 관한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의 글은 일연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일연은 1206년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태어났는데, 출가 전의 속명은 김견명(金見明)이다. 그는 아홉 살에 광주 무등산의 무량사에서 불교 공부를 시작해 14세에 강원도 설악산의 진전사에서 정식으로 승려가 된 후, 당시 불교 종단에서 실시하는 여러 종류의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후 주로 경상도 지역의 사찰에 머물렀는데, 78세가 되던 해에는 국가에서 국존(國尊)으로 임명해 고려의 승려 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84세에 인각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연이 태어났을 때 고려는 무신정권이 완전히 자리 잡은 시기였고, 스님의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는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려웠다. 일연이 70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라가 안정되면서 스님은 불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됐고, 이 시기에 [삼국유사]도 완성했다. 고려는 몽골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때 고려에 들어온 성리학은 후에 불교의 나라 고려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만드는 이념의 바탕이 된다. 일연의 시대까지는 국교로서 불교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으나, 새롭게 들어온 성리학이 지식인 사이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갔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서문에서 공자를 옛날의 성인이라고 말하고,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이성적 세계 인식이 필요함을 말했다. 그러나 종교적 신이(神異)함 또한 필요한 것이므로 이를 도외시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자신이 [삼국유사]를 쓰는 뜻은 이러한 종교적 신이함을 얘기하려는 것임을 밝혔다. 무신의 발호와 외적의 침입 그리고 새로운 사상의 도입으로 어지러운 고려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상했던 일연은, 이와 같은 국가의 시련을 종교의 신이함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삼국유사]의 집필 또한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겠다.
후반부는 불교적 내용 위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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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내용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역사적인 것이고, 후반부는 불교적 내용이다. 전반부는 도표 형식으로 만든 연대표인 왕력(王曆)과 역사상 기이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술한 기이(紀異)의 두 가지인데,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삼국 이외에 가락국이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설명을 따로 붙인 것이라든가, 고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기자조선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지 않은 것 등은 [삼국유사]가 지닌 독특한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반부의 불교적 내용에는 먼저 삼국에 불교가 들어온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다음 황룡사·낙산사·월정사 등의 구체적 불교 사적이나 관련된 신비스러운 사건들을 써놓았다. 원효나 의상 같은 뛰어난 승려의 이야기를 싣고, 고승들이 초월적 힘으로 미신과 악을 퇴치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이 밖에 역사에 이름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인물 가운데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도 있고, 명예나 벼슬을 추구하지 않은 인물의 행적도 실었다. 마지막에는 효도와 선행을 행한 인물도 기록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조선을 비롯한 한반도 초기 국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다. [삼국유사]는 이에 따라 조선 초기에 국가에서 역사서를 편찬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였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불교서적이라는 인식이 커졌고,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는 책이 돼버렸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소수의 성리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료와 민간에서 여전히 불교를 숭상했고, 왕실에서도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를 특별히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를 세운 지 100년 정도 지나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을 비판하는 상소문이 나타나기도 했다. 중종 11년(1516년) 한산군의 군수 손세옹은 삼국에 불교가 들어온 상황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고구려·백제·신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불교가 나라를 복되게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현재의 백과사전 같은 책인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권문해(1534∼1591년)도 [삼국유사]를 괴이하고 헛된 책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엔 괴이하고 헛된 책으로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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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을 쓴 이긍익(1736∼1806년)은 단군 관련 내용을 쓰면서 단군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용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그 설이 괴이하고 허황하고 비루하고 과장되어 애당초 거리의 아이들조차 속이기 부족한데,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이 이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역사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시각은 이덕무(1741∼1793년)도 마찬가지여서, [삼국유사]의 내용을 소개하고 나서 ‘그 말이 황당하고 허탄하다’고 한마디로 평가했다.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할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실어놓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도 [삼국유사]에는 사리에 어긋나는 기록이 많다고 했는데, 대표적 사례로 든 것이 고조선의 단군이나 신라의 박혁거세 관련 이야기 등이다. 환웅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나라를 다스리고, 인간으로 변한 곰과 환웅이 혼인해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얘기를 역사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다.
조선 후기에 [삼국유사]를 언급한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따라서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 외에는 [삼국유사]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조선의 학자는 대부분 [삼국유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불교적이며,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는 점 때문이었다. [삼국유사]를 언급한 학자들은 대부분 ‘실학자’로 불리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을 신봉하고, 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다. 일연이 강조했던 신이한 일들은 이들 성리학자들에게는 괴이하고 헛된 것일 뿐이었으므로, 조선 후기에 와서 [삼국유사]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책이 돼버린다.
조선 시대에 국가가 간행한 지리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은 성종12년(1481년)에 펴낸 [동국여지승람]인데, 이 책은 50년 후에 증보판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도 나왔다. 그리고 관찬 역사서 중에서는 성종16년(1485년)에 간행한 [동국통감]이 중요한 책이다. 국가가 편찬한 이 두 책에는 여러 군데 [삼국유사]를 참고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15세기 후반까지는 [삼국유사]가 꽤 알려진 책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1512년 경주에서 목판으로 간행됐으므로 조선 초기에 [삼국유사]가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서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415년 만에 최남선 통해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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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연구자들이 [삼국유사]에 관심을 갖게 된 까닭은 일본의 고대사 연구를 위해 [삼국유사]를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신라의 향가에도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에서도 자연스럽게 [삼국유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일본에서 처음 책이 간행된 지 20여 년 후인 1927년에 최남선은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계명] 18호에 ‘삼국유사 해제’와 함께 본문을 활자화해 발간한다. 이는 [삼국유사]의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삼국유사]에 관한 책을 가장 열정적으로 내온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1512년 경주에서 한 번 인쇄된 다음, 실로 415년 만에 [삼국유사]는 최남선의 손을 통해 새 옷을 입고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이었다.
최남선이 쓴 ‘삼국유사 해제’는 오랫동안 [삼국유사] 연구의 지침이 됐다. 최남선은 “[삼국사기]는 중국의 문헌에서 뽑아온 글 위주이고 그 밖의 내용도 주로 중국화된 것인 데 비해, [삼국유사]는 맥락이 끊어지고 뒤섞인 것이 많고 허황된 내용이지만 한 조각 고유의 내용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자신은 [삼국유사]를 택하겠다”고 했다. 최남선의 이 같은 발언은 [삼국사기]는 사대적 내용의 책이고, [삼국유사]는 자주적 내용의 책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심어줬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두 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사라진 책에서 민족문화의 원형으로
해방이 되면서 [삼국유사]의 위상은 이전보다 더욱 높아지게 된다. 해방 후 1946년에 처음으로 [삼국유사] 한글 번역본이 나왔는데,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번역본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는 원문 이미지와 함께 세밀한 각주를 붙인 번역본을 볼 수 있고, 여기에 더해 다양한 해설도 읽어볼 수 있다. 수천 편이 넘는 [삼국유사] 관련 논문이 나와 있고, 연구서도 많이 간행됐으며, [삼국유사]에 관한 각종 교양서적도 셀 수 없이 많다.
일연은 고려 후기에 성리학적 세계관이 점차 세력을 넓혀가는 것을 보면서 불교적 이상이 실현되는 세상으로 회복되기를 꿈꿨고, 그 꿈이 [삼국유사]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삼국유사]의 내용을 허황하다고 배척한 것 또한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이상을 추구한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배척했으므로 [삼국유사]의 내용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도 분명하다.
일본 학자들이 19세기 말부터 [삼국유사]를 연구한 것은 책의 내용이 일본 역사 기술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남선이 일본에서 나온 [삼국유사]의 가치를 알아보면서, 사실상 조선에서 없어졌던 책이 1927년 최남선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다. 현재 [삼국유사]는 민족문화의 원형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제도교육 속에서 [삼국유사]는 그런 효용을 갖고 있는 텍스트로 쓰이고 있으며, 전통문화와 관련된 갖가지 사업에서 [삼국유사]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자리 잡았다. 21세기의 [삼국유사]는 이런 의미를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