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속 그 이야기 <45> 강원도 평창 오대산 선재길(중앙일보) 201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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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5-01-01 13:55 조회9,173회 댓글0건본문
그 길 속 그 이야기 <45> 강원도 평창 오대산 선재길
천년 역사 간직한 구도자의 길, 백색 융단 밟으며 나를 만났다
1 선재길은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길이다. 길을 걷다 보면 오대천을 가르는 섶다리가 나온다. 소나무로 기둥과 상판을 만들고 잔가지를 얹어 그윽한 풍경을 자아낸다.
겨울 오대산은 맑았다. 월정사 어귀 전나무 숲길은 청량했고,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선재길은 ‘구도자의 길’답게 순수했다. 오대천에도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 소리를 낮췄다.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라고 오대산은 가르치는 것 같았다. 선재길이 속한 강원도 평창 진부면의 기온이 영하 10도라는 예보를 보고 내려갔다. 우려와 달리, 겨울 오대산의 품은 안온했다.
2 길에서 만난 거제수나무. 양파처럼 얇은 껍질을 벗고 있다.
# 천년고찰 길목의 천년 전나무 숲길
643년 신라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유학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고 그가 지명한 강원도 오대산에 월정사를 세웠다고 한다. 오대산을 한국 불교 문수 신앙의 성지라 일컫는 이유다.
선재길은 오대산 월정사와 말사(末寺) 상원사를 잇는 길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13년 10월 옛길을 복원하면서 ‘선재길’이라 이름한 것은 실제 구도자가 걸었던 길이어서다. 길 이름은 『화엄경』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구도자 ‘선재동자(善財童子)’에서 따왔다.
해발 1563m의 오대산은 높은 산이지만, 오대산이 품은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월정사 입구부터 이어진 전나무 숲길부터 그러했다. 월정사 일주문을 통과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 중 하나라는 전나무 숲길이 펼쳐졌다. 40m 높이의 푸른 전나무 1700여 그루가 빽빽했고, 길바닥은 ‘백색 융단’이었다. 눈 내린 겨울이어서 색 대비가 극명했다. 숲이 내뿜는 숨으로 몸이 정화되는 듯했다. 불교와 인연이 없어도 이 길에서는 숙연해졌다.
3 천년고찰 월정사 경내에 서 있는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
1㎞쯤 이어진 숲길을 지나 월정사에 닿았다.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 경내는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을 제외하고 깡그리 불탔다가, 1964년 탄허스님(1913~83)이 재건했다. 탄허스님이 누구인가? 한국 현대불교의 거목으로, 유불도(儒佛道)에 통달한 학승(學僧)이었다. 선재길에서 탄허를 빠뜨릴 수 없는 건, 그가 지혜를 깨치고자 이 길을 수도 없이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재길은 ‘길(道) 찾는 길’이었다.
10대 후반에 이미 상당한 학문의 경지에 이른 탄허는 상원사 한암 스님(1876~1951)과 3년간 서신 문답 끝에 상원사로 출가한다. 약관의 청년과 57세 노선사가 ‘도’를 주제로 교분을 나눈 것이다. 출가 후 탄허는 평생 경전 번역에 매진했고, 시대의 선각자로 추앙받았다. 지금도 전국 사찰에는 그의 제자가 강백(講伯·경론을 강의하는 승려)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 구도자의 길, 이제는 치유의 산책길
4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길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통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선재길을 개통하기 전에도 길은 있었다. 월정사가 2004년부터 걷기 행사를 하면서 옛길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수십 년 전, 아니 더 아득한 천년 전에 승려들이 두 발로 다졌던 흔적을 찾은 것이다.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부쩍 늘기 시작했어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숲길을 걸으며 심신의 치유를 경험했던 거죠. 찻길이 아니라 진짜 구도자가 걷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만든 게 옛길 복원사업입니다.” 월정사 박재현 종무실장의 설명이다.
어엿한 산책코스로 부활한 길은 이제 징검다리와 쉼터, 데크로드와 안내판을 갖추고 지친 중생을 기다리고 있다. 길이 9.4㎞, 표고차 200m로 완만해 누구나 삼림욕을 즐기며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다.
길은 월정사 북쪽 800m 지점, 회사거리에서 시작한다. 회사라니, 이 산골짝에 면사무소라도 있었단 말인가. 실은 일제 강점기 목재공장이 있던 자리다. 당시 공장에서는 박달나무로 훈련용 목총을, 측백나무로 연필을 만들었다. 일제 강점의 흔적은 지금도 산재길 곳곳에 남아있다. 벌목한 나무를 오대천 물길따라 한강까지 보내기 위해 만들었던 보메기(보)와 주문진까지 이어졌던 철로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안내판을 따라 탐방로에 들어서면 바로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가 기다린다. 개천 물길 따라 징검다리 십여 개를 지그재그로 건너게 돼 있다. 선재길은 오대천을 사이에 두고 446번 지방도와 나란히 진행한다. 20~30m 남짓한 거리지만 찻길에서 보는 숲길은 비밀스럽다. 나무들이 잎을 털어내 앙상한데도 숲 속 사정을 알 길이 없다. 그만큼 숲은 빽빽했다.
회사거리에서 동피골까지, 신갈나무와 단풍나무가 숲을 이룬 5㎞ 남짓한 길은 평지에 가까웠다. 월정사에서 3㎞쯤 걸어서 올랐을 때, 사극에서나 봤던 다리가 나타났다. 굵은 소나무로 기둥과 상판을 만들고 잔가지를 얹은 섶다리였다. 다리를 지나자, 거무튀튀한 나무 사이사이에 거제수나무(자작나무과)가 양파처럼 제 몸을 벗고 있었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 사람들은 나무껍질에 글을 썼다고 한다. 옛길 걷던 구도자도 여기에 깨달음의 글을 적었을 것이다.
# 세조가 피부병 고쳤다는 전설의 천
5 동피골 인근에 자리한 오대산장. 다음달부터 숙소로 운영할 예정이다.
동피골에 이르니 작은 산장 하나가 보였다. 여기서 한숨을 돌리고, 다시 상원사까지 3㎞ 길을 올랐다. 푸른 조릿대가 지천인 풍경이 아래쪽과는 사뭇 달랐다. 출렁다리 안쪽에는 화전민 터가 있었다. 60년대까지 선재길 곳곳에 화전민 360여 가구가 살았지만 68년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월정사 아래로 모두 이주했다. 선재길은 구도자의 길만은 아니었다. 이 산중까지 들어와 살던 중생도 걷던 길이었다.
상원사가 가까워지자 다시 빽빽한 전나무 숲이 나타났다. 길은 상원사에서 비로봉ㆍ두로봉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선재길은 여기서 끝이 났다. 상원사 입구에는 세조가 옷을 걸어두었다는 관대 걸이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여기에도 불교 전설이 전해온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죄책감에 피부병이 도졌다.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세조가 오대천에 몸을 씻던 중 지나가던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했고, 이때 피부병이 나았다. 목욕을 마친 세조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발설하지 말라”고 말하자, 동자승이 “대왕은 어디 가든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크게 감격한 세조는 문수보살의 화상과 목각상을 상원사에 모셨다.
상원사는 비록 월정사의 말사이지만 명성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를 불태운 국군이 상원사로 올라왔을 때, 한암선사는 불상 앞에 정좌하고 불을 지르라고 소리쳤다. 스님의 일갈에 압도당한 장교는 문짝만 뜯어 마당에서 태웠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다는 적멸보궁, 신라 성덕왕 때 만든 동종(국보 제29호)도 상원사에 있다. 한때 한강 시원지(始源地)로 불렸던 우통수도 절에서 멀지 않다. 이곳은 물의 근원이었고, 구도자에게는 지혜의 샘이었다.
상원사 입구 현판에는 “천고의 지혜, 깨어있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계단에 걸터앉아 무심히 글귀를 보고 있는데, 곤줄박이 한 마리가 날아왔다. 눈높이 1m 앞까지 날아온 녀석은 뭐라고 지저귀더니 휙 하고 날아갔다. 지혜가 뭔 줄 아느냐고 묻는 듯했다. 오대산에서는 미물조차 영험하게 보였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편린이라도 맛본 것일까? 눈이 다 녹고 초록이 움트는 봄, 힘찬 물소리, 새소리 들으러 다시 선재길을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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