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대산 천년숲길-월정사-선재길-상원사(법보신문-8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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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5-08-21 09:36 조회7,926회 댓글0건본문
선재, 깊은 침묵의 세계로 초대하다.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에
잡스런 생각 떨치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아라”
▲ 전나무가 즐비한 천년숲길은 묘하다. 걸을수록 깊은 곳으로 침잠해 가는 듯하다. 분명 평지인데 말이다. |
하루의 첫 햇살이 아직 드리워지지 않은 새벽녘. 8월의 녹음을 품고 길게 난 오대산 천년숲길에 첫 발을 내딛는다. 깊은 침묵!
한 마리 다람쥐가 흔들어 놓은 풀잎 소리 청량하고, 바람 길 따라 지줄대는 짙푸른 나뭇잎은 싱그럽다. 휘돌아 친 저 붉은 길로 들어서면 또 다른 시공간이 펼쳐져있을 것만 같다. 걷는다. 숲이 내어준 신비의 길이니 주저할 것 없이 그냥 걷는다. 한 발, 두 발, 세 발. 침묵은 더 깊어만 간다.
한 여름의 끝자락에 매달려 마지막 힘을 다해 노래하는 매미소리를 따라가니 전나무 한 그루가 당당하게 서 있다. 전나무 가지에 걸린 이야기 한 토막.
▲ 동녘하늘에 하루의 첫 빛이 들었다. 석조보살, 오늘은 ‘황금구름’을 적광전 석가모니부처님께 올릴 수 있겠다. |
고려 말 오대산 북대서 수행하고 있던 나옹선사는 매일 월정사로 내려와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다. 어느 날 공양을 들고 내려오는데 소나무 가지에 쌓였던 눈이 떨어졌다. 나옹선사가 소나무에게 호통 쳤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너도 부처님 은혜로 이 산에서 살고 있지 않느냐?’ 소나무의 참회가 있었던 것일까? 그 후로 소나무는 오대산에서 제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소나무가 서 있던 빈자리는 전나무(일설에는 아홉 그루.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가 차지했겠다. 1700여 그루의 전나무가 지금 이 숲에 서 있는 건 600여년 전의 전나무 아홉 그루가 씨앗 뿌리고 보듬은 결과다.
세어 본 적은 없지만 언뜻 보아도 오대산에는 전나무보다 소나무가 더 많다. 참회기도 끝낸 소나무, 나옹선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숲을 찾았던 게지. 긴 호흡! 안온함과 아득함이 교차하는 자리서 미묘한 환희심이 샘솟는다. 하루 종일 이 숲길에 서 있어도 좋겠다. 허나, 떠나야 한다. 그 아득한 옛날부터 선지식들이 걸었을 선재길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 20리를 걷는 동안 계곡과 함께할 수 있는 산길은 ‘선재길’ 하나일지 모른다. |
상원사와 중대 사자암의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20리 선재길.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 친견하고 얻은 부처님 사리를 적멸보궁에 안치하려 조심스레 걸었던 길이다. 신라의 두 왕자 보천, 근현대의 한암, 그리고 그의 제자 탄허가 걸었던 그 길이다.
▲ 힘차게 내려오는 계곡물에 번뇌마저 씻겨가는 듯하다. |
허공을 삼킨 선지식 탄허(呑虛)! 이미 유학에 밝았던 탄허는 오대산 입산 전(세납 20세) 편지를 통해 한암과 도담(道談)을 나눈다.
‘… 도를 들어도 믿지 못하고, 도를 믿는다 해도 돈독하지 못합니다. 구슬을 갖고도 구슬을 잃어버리고, 나귀를 타고서도 나귀를 찾는 허물이 있습니다. 또한 쇠(鐵)를 은(銀)으로 부르고, 벽돌을 갈아 거울로 만들려는 병폐마저 들었습니다. …’
▲ 오대천에 들어선 순간 그 누구라도 천진난만해 질 것이다. |
장자의 도(道)라도 제대로 새겨 삶의 지표로 삼아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선가의 도에 기반한 한암의 답신은 명쾌하다.
‘도는 본래 천진하고 또한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으니 실로 배울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따로) 생각을 두어 도를 배우고자 하면 (오히려) 도는 미(迷)하게 됩니다. (오로지) 간절한 한 생각(一念)만 있을 뿐입니다. … 도를 알고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도가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
유학에 정통했던 젊은청년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한 일언이다. 한암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세납 22살의 청년은 당당하게 이 길을 걸어 상원사로 향했을 게 분명하다.
선재길 초입, 한 때 탄허 스님의 제자였던 박용열 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 앞면엔 그의 대표작 ‘노을’이, 뒷면엔 ‘오대산 가는 길’이 새겨졌다. ‘오대산 가는 길’에는 애틋함이 묻어 있다.
6·25 한국전쟁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한 쪽 발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박용열. 폐까지 좋지 않아 피까지 토했던 그는 월정사 앞마을에 움막 하나 짓고 생을 이어갔더랬다. 마을 사람들은 알았다. 겨울날 채비 없이 저리 있다가는 한 겨울도 견디지 못할 것임을. 누군가 오대산을 찾으라 했다. 절집이라 해도 남루한 행색에 발까지 저는 사람을 반길리 만무하다. 그 때 조실로 있던 탄허 스님이 한마디 이른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 금강교. |
탄허 스님의 제자가 된 그는 스님이 역경한 ‘화엄경’, ‘영가집’, ‘육조단경’ 등을 책으로 만들며 시봉했다. ‘고무신 하나 못 사주는 처지에 무슨 도제교육이냐’ 대들었던 사람, 너무도 배고파 부처님 전에 올린 공양물을 훔쳐 먹었던 박용열은 끝내 환속했다. 허나, 세속에서의 삶은 출가사문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의료봉사에 헌신했고, 신춘문예 등단 후 불교사상을 토대로 한 시로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 그가 탄허 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시집 ‘오대산 가는 길’을 냈더랬다. 스승을 향한 사모곡이요, 출가사문의 제자 노릇을 끝까지 못했던 참회의 노래였다. 탄허 스님, 고령의 제자를 보고 있다면 흐뭇해 할 것이다. 자기 자리를 찾았으니 말이다.
‘… 찬바람 불고 서리 오기 전에/ 어디로 갈까/ 걸망 메고 망설이다가// 가부좌 틀어 눈 감으니/ 바로/ 이 자리가 그 자리인 것을/ 내 어찌하여 그렇게도 몰랐을까.’(‘오대산 가는 길’ 일부)
▲ 선재길 끝에서 나그네를 맞는 상원사 전경. 여기서 잠시 쉬었다 적멸보궁으로 걸음하면 금상첨화다. |
세간의 아픔 짊어지고 이 길을 걸었던 사람 어디 박용열 시인뿐이랴. 지혜 얻고자 오체투지 심정으로 이 길을 걸었던 스님이 탄허 뿐이었으랴. 선재의 향훈을 따라 이 길 걷는 사람 모두 그만한 애환과 구도열 있지 않겠나.
저만치 앞서 있는 선재동자가 이른다. ‘잡스런 생각일랑 굽이쳐 내려오는 물줄기에 떨쳐 버려라!’그렇다. 나옹선사처럼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야 하지 않겠나!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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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잡이
들머리는 월정사 금강교 앞 주차장. 금강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천년숲길로 불리는 전나무 숲길(1km)이 펼쳐져 있다. 월정사에서 800m 떨어진 지점에 일제강점기 당시 목재공장이 있던 회사거리가 있다. 선재길(약 8km)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계곡따라 걷다 섶다리를 만났다면 잠시 쉬어가시라. 선재길만이 전하는 묘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이다. 계곡 옆 숲길에 놓인 데크로드를 만났다면 물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거의 반은 왔다. 선재교에서 만나는 오대산 산장 옆 멸종위기 식물원을 보고 상원사를 향해 다시 걷다가 출렁다리로 들어서면 계곡 옆 숲길을 만난다. 여기서부터 상원사까지는 약 2km. 일주문에서 상원사까지의 총 거리는 약 10.4km. 3시간40분 소요. 상원사에서 월정사로 가는 버스(진부행)가 있다. 상원사 앞 버스 출발 시간은 다음과 같다. 오전 8시10분, 9시20분, 10시30분. 11시30분. 오후 12시40분, 2시, 2시50분, 4시20분, 5시20분.
이것만은 꼭!
월정사 적광전 : 적광전은 1960년 중반 탄허 스님 원력으로 조성된 전각이다. 미스터리한 건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이다.
팔각구층석탑 : 적광전 앞에 서 있는 높이 15. 2m의 석탑이다. 상륜부 장식 외에는 모두 화강암으로 조성됐다. 학계는 고려시대 유행했던 다각다층석탑의 대표격으로 보고 있다. 국보 제48호다. 1970년 석탑 해체보수 때 나온 사리장엄구는 월정사 보장각에 보관돼 있다.
석조보살좌상 : 미소가 아름다운 이 석조보살좌상은 팔각구층석탑 앞에 앉아 있다. 전체 높이는 1.8m. 탑을 향해 왼쪽 무릎을 세우고 있는 공양상이다. 고려시대(11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물 제139호.
<옮긴이 : 월정사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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