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은 찰나 사랑하는 이를 찾아가자(11월3일-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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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5-11-03 08:57 조회7,537회 댓글0건본문
월정사 가을밤의 깨달음
▲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 입구. photo 연합 |
몇 년 전인가. 깊어가는 가을, 월정사 문화행사에 초대받아 갔다. 오대산 단풍은 절정이었다. 단풍을 꿰어 비치는 햇빛과 소슬한 바람 속에서 300년쯤 살아도 좋겠다 생각했다. 백 년은 찰나다. 새를 쏘러 숲에 들어가기에도, 평화로운 시대를 만나 막스 브르흐의 ‘콜니드라이’나 연거푸 들으며 딸 셋을 기르는 육아에만 전념하기도, 콧수염을 기르며 목성을 연구하기에도 백 년은 너무 짧다! 300년을 산다면 실수와 과오로 어그러진 인생을 바로 세우고 지금보다 더 늠름한 인격과 고상한 취향을 가진 인간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산속 밤은 급격하고 전면적이다. 해가 지자 사방이 먹을 친 듯 캄캄해졌다. 월정사 뒤뜰로 나갔더니 인공조명 하나 없이 짙푸른 밤하늘이 와락 달려든다. 검은 벨벳 위에 진주 알갱이를 뿌린 듯 별들은 초롱초롱했다. 분명 세계 밤하늘 보존협회에서 탐낼 만한 하늘이다. 가까이에서 여치아목류의 벌레들과 작은 곤충들이 울고, 먼 데서 올빼미가 울었다. 그 밤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어우러진 교향(交響)이 모호하고 형상 없는 삶을 온전한 실감으로 돌려주었다.
그 시절 나는 혼자였다. 철학자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라고 했다. 노동자도 농부도 아니건만 나는 하루의 3분의 2를 내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봉급에 매인 자도 아니면서 늘 원하지 않는 일들을 했다. 먹고 사랑하며 노래하고 기도하는 삶을 원했건만 실제 삶은 그렇지 못했다. 태정이네 텃밭에 도라지꽃 피면 도라지꽃 보고, 말뚝에 매인 채 우는 이장네 검은 염소나 지켜보고, 겨우 고등어 한 토막이나 구워 밥 먹고 살았다. 삼림욕장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생활 속에서 딱히 이룬 것도 실패한 것도 꼽아보기 어려웠다.
산속의 밤공기 속에서 나는 나를 돌아다봤다. 풀벌레들이 지르르 지르르 울었다. 호수와 협곡도 없는 편평한 땅 위에서 나는 무슨 야망을 품었기에 등골이 휘도록 일을 했을까? 왜 그토록 책에 빠져 살았을까?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윌리엄 워즈워스의 ‘송시: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영원함을 느낌’이라는 시 몇 구절을 떠올렸다. ‘우리의 출생은 한낱 잠이며 망각일 뿐/ 우리와 함께 떠오른 영혼, 우리 삶의 별은/ 다른 곳에서 진 뒤에 먼 곳에서부터 왔다.’ 태어남은 한낱 잠이며 망각인 것을! 시인은 우리 삶의 별은 다른 곳에서 진 뒤 이곳에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죽으면 또 다른 곳에서 태어날 수도 있겠지.
그 밤의 결론은 착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오래된 서책이나 파고, 은행 융자에 허덕이며 살 수만은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사랑하자. 황토방 흙벽을 긁어 그 텁텁한 걸 입속에 털어넣으며 고독하다고 울부짖지 말자. 그까짓 ‘한국고대사’ ‘국어음운론’ ‘인문지리학’ 따위는 덮어두자. 빌리 조엘의 노래를 들으며 수염을 깎고 샤워하며 콧노래라도 부르자. 늦봄엔 살찐 보리숭어 살점을, 여름엔 남해 민어탕국을, 늦가을 싸늘해지면 동파육을 먹으며 살자. 상주 곶감을 사들고 혼자 사는 노모를 찾아가자. 시집간 여동생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자. 사랑하고 싶은 이들을 사랑하며 살자. 그게 착하게 사는 삶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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