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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한 유언 "내가 죽거든 월정사에..."(1월11일-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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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01-12 09:22 조회7,9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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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어귀 일주문 '월정대가람' (2008. 3. 촬영)
ⓒ 박도



오대산 월정사로 가다

조카 내외는 2016년 1월 12일에 내가 돌아오는 줄 알고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출국한 지 1주일 만에 갑자기 돌아오게 되니 아무튼 약속 위반이다. 나는 귀국 후 여러 차례 신세를 진 오대산 월정사 원주실에 숙식을 부탁드렸다. 다행히 명상관 입소를 허락하여 지난해 12월 29일부터 1월 12일까지 보름동안 예정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연말연시를 천만 뜻밖에도 산사에서 지내고 있다.

불가에서는 '이생에서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인연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수십 년째 이런 저런 일로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를 찾고 있다. 그동안 이곳에서 여러 날 공양도 하고, 잠을 잤으니 아마도 내 전생에 불가와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오대산 월정사를 알게된 것은 50여 년 세월이 지났다.

고2 때 국어시간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승무(僧舞)'를 배울 때, 학교에서 특별히 그분을 모셔 특강을 듣게 되었다. 그후 대학에서 다시 조지훈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지훈 선생은 내가 평생을 두고 만난 훌륭한 스승 가운데 한 분이신데, 그분은 젊은 날 한때 오대산 월정사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다. 그런 탓인지 그분의 시에는 불교 색채가 짙었고, 때로는 당신이 앞장서서 여름방학이면 학생들을 인솔하여 월정사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대산 월정사를 알게 되었다.

1965년 나는 대학 국어국문학과 신입생이었는데, 그해 여름 불교학생회에서 여름방학 수련회를 오대산 월정사에서 가졌다. 그때 10여 명의 학생들이 상원사에서 오대산으로 내려오던 도중에 소나기가 내려 갑자기 불은 오대천 계곡을 건너다가 급류에 휩쓸려 꽃다운 나이에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불귀의 객이 된 김아무개 선배는 유난히 나에게 잘 대해줬다. 그해 여름, 나는 그 월정사 계곡의 조난 소식에서 그 선배의 운명에 크나 큰 슬픔에 잠겼다. 사실 그때 내 형편이 조금 괜찮았다면 나도 그 수련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상님을 수목장으로 모시다

이후 가족들과 또는 친구들과 이따금 오대산 산사와 비로봉을 찾았고, 1980년대부터 내가 학교에서 학년부장 보직을 받은 뒤 수학여행을 기획하고 인솔할 때 설악산으로 가면서, 가는 길이거나 돌아오는 길에 꼭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그리고 적멸보궁을 산행 코스에 넣었다. 오대산 들머리 오대산청소년수련원을 개원할 때는 학생들과 함께 2박3일을 머물며 이 일대를 답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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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 1. 작품 취재차 월정사를 탐방하다.
ⓒ 박도


1990년초 나의 데뷔작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을 쓸 때는 첫 장면을 월정사로 배경 삼았기에 두어 차례 답사뿐 아니라, 한 겨울 아들과 함께 월정사 선방에 묵으며 새벽예불에 참례하며 그 장면들을 작품 속에 용해시키기도 했다.

폭설로 시외버스가 대관령을 넘을 수 없게 되자 두 남녀는 달밤에 걸어서 월정사로 찾아가 각기 다른 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뎅' 하는 범종 소리에 잠을 깼다. 불상 앞 촛대에는 그때까지 촛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시계를 봤더니 세 시가 조금 넘었다. 그 새 두어 시간 눈을 붙임 셈이다. 무리한 여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가뿐했다.

갈증이 났다. 옷을 입고 뜰로 나왔다. 달이 어느 새 서편으로 기울어 있었고, 하늘의 별들이 잘 익은 석류 알처럼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했다.

범종각 옆 식수대로 갔더니 석간수가 졸졸 흘렀다. 영하의 찬 날씨였지만 식수대에서는 서릿김이 안개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조롱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마셨다. 온몸이 오싹했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중에서

그 후로도 자주 오대산을 찾다가 2000년대 초 월정사에서 지장암 전나무 숲에 수목장을 마련한 것을 알았다. 나는 이 시점에서 수목장은 지구 환경에 가장 이상적인 장묘라는 것을 깨우쳤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고 윤달을 기다린 끝에 2012년 5월 선산에 모신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파묘 화장한 다음 이곳 월정사 앞 전나무 숲에 수목장으로 모셨다.

그날 참석한 친지들과 헤어진 뒤 돌아오면서 핸들은 잡은 아들에게 나는 유언을 했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월정사 원주실에 부탁해 내 유해를 네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전나무 추모목 뿌리에 뿌려라. 만일 원주실에서 그 추모목에 정원 초과로 안 된다고 하면 가까운 곳에 새 나무 뿌리에 유해를 묻어주렴. 그리고 너희 어머니가 죽으면(아내는 이미 사후 시신 기증을 했기에)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잘라 아버지 유해 묻은 곳에다가 묻어다오."

아들은 내 유언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이곳은 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이미 조상의 유해도 이곳으로 모셨고, 위패도 월정사 수광전에 모셨다. 그래서 나는 일 년에 대여섯 번 이상 이곳을 찾아 조상님 영혼과 만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내 고향산천 만큼이나 낯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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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님의 유해를 전나무 뿌리에 수목장하다(2012. 5.)
ⓒ 박도



방한암 스님을 만나다

나는 지난해 12월 29일에 이곳으로 온 뒤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다. 애초 계획은 새 작품을 쓰려고 했지만 기필이 잘 되지 않아 지난해 손보던 작품을 다시 마무리하고 있다. 그러던 중 산책삼아 몇 해 전, 장편소설 <약속>을 쓰면서 현장 답사했던 동피골 계곡의 오대산산장 커피 생각이 나서 지난 1월 6일 점심 공양 후 상원사 행 버스에 올랐다. 오대산 산장은 상원사 가는 길목으로 동피골 개울 옆 선재길 출발점인 선재교 앞에 있다.

이태 전 여름, 이곳을 답사하며 들렀을 때는 두 할머니가 지켰는데 이즈음 젊은 보살님이 두 손으로 합장하며 반겨 맞았다. 이태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매우 정감이 갔다.오대산장은 산행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찻집이라기보다 아주 깨끔하고 아담한 산중 도서실로 안정감이 갔다. 실내 한가운데 무쇠난로에는 장작들이 쉬엄쉬엄 타고 있었고, 그 나무 타는 은은한 냄새가 아득한 내 어린 시절의 향수를 되새기게 했다.

겨울 산에 사람이 귀했든가. 산장주인의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니연화(泥蓮華)'라는 법명을 가지신 오대산장 주인은 겨울 나그네에게 무쇠 나무난로에 구운 고구마와 오대산장 뜰에서 직접 땄다는 잣을 손수 까서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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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전나무숲길의 고사목(2008. 3. 촬영)
ⓒ 박도



나는 도서관과 같은 오대산장 다실에서 군고구마와 잣에 곁들여 원두커피를 마시며 서가의 책을 훑어보는데 주로 불교 관련 책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그리운 스승 한암스님>이라는 책을 펼치자 방한암 선사님의 일화집이었다.

나는 한동안 고1 국어교과서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상원사를 전란의 화마에서 구한 방한암 선사의 일화를 배우고 가르친 바 있기에 그 책을 뽑아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하지만 곧 막차시간이 되어 다 읽지 못한 채 서가에 꽂고는 정류장으로 가서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도착한 버스를 타고 내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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