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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는 어떻게 전란의 화마를 피했을까 (1월16일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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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01-18 16:38 조회7,5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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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사 문수전(2010. 8.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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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불행은 생각하기 나름

이틀 후인 지난 1월 8일, 그 책도 보고 싶고, 커피 생각도 간절하여 다시 오대산장을 찾았다. 깊은 겨울철로 여전히 산장에는 손님이 없었다. 산장주인은 전날과 같이 큰절로 맞았다. 사실 손님이 주인에게 대접을 잘 받으려면 찾는 이가 적은 비철에 찾아야 한다. 손님들이 많을 때는 자리에 죽치고 앉아있기도 미안하거니와 서가에서 책을 뽑아 여유롭게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전날과 같이 무쇠 나무난로 가에서 주인이 준 별미 군고구마와 잣, 그리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서가의 <그리운 스승 방안암 스님>을 뽑아 읽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으랴.

사실 사람의 행, 불행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영하 30도의 만주벌판에서도 일제의 사냥개들을 경멸하면서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고 기쁨을 느끼는 독립지사가 있는가 하면,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재벌의 딸로 태어나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자진하는 게 인생이다.

나는 전날에 이어 한암 스님의 여러 일화에 빠졌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상원사를 화마에서 구한 일화를 소개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있었던 얘기다. 전쟁이 일어나자 대부분 사람들은 피난을 떠났으나 방한암 스님은 그대로 상원사를 지켰다. 전쟁 발발 초기에는 인민군들의 기습 남침으로 남한 각지가 그들에게 삽시간만에 점령당하는 바람에 월정사나 상원사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겨울,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난데없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다시 38선상에서 방어선을 구축할 무렵은 그 사정이 달랐다. 미8군사령관 워커는 38선에서 방어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해 12월 22일 워커 사령관은 예하부대에 인민군과 중국군이 산간지역에 은폐할 수 있는 근거지를 철저히 초토화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받고 국군은 상원사로 올라왔다. 그들 가운데 책임 장교는 상원사 방한암 스님에게 월정사는 공산군의 근거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이미 상부의 지시로 소각하였다고 말한 뒤, 상원사도 작전상 즉시 소각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때 월정사가 불타오르는 연기가 상원사에서도 보였다. 

상원사가 전란을 피한 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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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한암 스님
ⓒ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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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방한암 스님은 국군 장교에게 잠시 작전수행을 멈추게 한 뒤 그 길로 법당에 올라갔다. 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차려입은 뒤 당신은 법당에 정좌한 채 부처님을 향해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장교가 한참을 기다리다가 지친 나머지 스님에게 법당을 떠나라고 말했다.

"나는 불자로서 법당을 지키는 것은 나의 도리이니 어서 불을 질러라!"

방한임 스님은 정좌한 채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차마 불을 지르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국군 책임장교가 스님에게 다가가 말했다.

"스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도 방한암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더 큰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이 절에 불을 놓는 것이 임무이니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고, 나는 중으로서 부처님 명령에 따라 이 절을 지키면 되지 않겠느냐. 본래 중들은 죽으면 당연히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제 나이도 많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걱정 말고 어서 불을 질러라!"

하지만 군인들은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스님의 상호(얼굴)와 단호하면서도 의연한 스님의 말씀에 눌려 아무도 불을 지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은 상부의 작전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는 진퇴양단이었다.

한동안 국군 장교는 한참 깊은 고민을 하다가 문득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그는 부하들에게 법당 문짝들을 떼어 마당에 쌓으라고 일렀다. 그런 뒤 그는 마당에 쌓은 그 문짝들을 불질렀다. 그 불길이 솟고, 그 연기가 오대산 능선으로 피어올랐다. 그 문짝들이 모두 재로 변할 즈음, 국군들은 슬그머니 상원사를 따났다.

그래서 상원사는 오늘날까지 천 년 고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방한암 스님은 1951년 3월 21일 열반에 드셨다. 그날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상좌에게 물었다.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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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암 스님 입적 직후 모습
ⓒ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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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암 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차려 입고 선방에 단정히 앉았다. 그런 뒤 스님은 앉은 채로 곧장 열반에 드셨다. 세수 75세요, 법랍 54년이었다.

나는 이번 겨울, 뜻하지 않게 오대산에 머물면서 덤으로 한 고승(高僧)의 행적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일찍이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하셨다. 아마도 산문을 나설 때 내 발걸음은 무척 가벼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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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2010. 8.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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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대산 월정사 발간 <그리운 스승 한암 스님>과 <오대산 월정사 이야기> 두 권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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