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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앞에서 참선할 필요없다…문제는 신심”(4월28일-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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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04-28 16:28 조회7,6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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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스님.불교신문 자료사진

“계행이 엄하고 청정하도다. … 지혜가 명백하도다. 중생을 위하여 대자비를 베풀어 종횡으로 선을 설하도다.” 1995년 한암문도회가 펴낸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에 실린 서옹스님은 서문 가운데 일부이다. 평생 계행을 지키며 수행 정진한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스님의 삶을 잘 표현했다. 오는 5월3일 4교구본사 월정사(주지 정념스님)에서 봉행되는 한암대종사 141주년 탄신다례재를 앞두고 한암스님의 가르침을 돌아 보았다.

경허스님 “개심(開心) 경지 넘었다”

한국전쟁 당시 상원사 ‘수호’

평생 계행 지키며 선교겸수 

 

○…“선(禪), 염불(念佛), 간경(看經), 의식(儀式), 수호가람(守護伽藍)” 1926년으로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이 후학들의 지남(指南)으로 제시한 승가오칙(僧伽五則)이다. 평생 참선 수행한 선객(禪客)이었지만, 선에만 천착하지 않고, 교학 연찬과 염불 지송(持誦) 등을 출가사문의 덕목으로 꼽았다. 선교(禪敎)를 겸수하고, 불교 의식과 가람을 수호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르침이다.

○…1921년 한암스님은 금강산 만일암에서 납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때 스님은 수좌들의 수행공동체에 해당하는 선원(禪院)에서의 규칙을 제시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는 청규가 ‘선원규례(禪院規例)’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대중살림’이 수행의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강조했다. “도를 배우는 학인이 대중과 거처하지 않으면 옥을 갈고 닦아 그릇을 만들기 어렵고, 대중과 함께 사는 데 규칙이 아니면 권장하여 닦아 나갈 수 없다” ‘선원규례’에서 스님은 선원의 각 소임자들이 갖춰야할 덕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일부만 예를 들면 수좌(首座)는 덕이 고매하고 계행이 청정하여 대중의 모범이 된 자, 원주(院主)는 사리가 명백하고 상벌이 공정하여 대중의 마음의 기쁨을 주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울력이 있을 때는 모두 나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했으며, 대중의 질서를 어길 경우 두세차례 가르쳐 습관으로 고치도록 하고, 그래도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대중에게 고하고 선원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했다.

○… 근현대 한국불교의 중흥조 경허(鏡虛)선사 회상에서 정진할 때의 일이다. 1899년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선사의 <금강경> 법문을 듣고 첫 번째 깨달음은 얻은 후 무자(無字) 화두를 받았다. 1901년 통도사에서는 경허선사를 모시고 지전(知殿) 소임을 보면서 동안거 결제를 했다. 이어 2년간 해인사 퇴설선원에서 조실 경허스님 회상에서 수행할 당시 “원선화(遠禪和, 한암스님)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었다”며 오도(悟道)을 인가받았다. 경허선사와 한암스님의 인연은 깊다. 1942년 만공, 만해, 석우, 석주, 동산, 철우 스님 등과 함께 <경허집(鏡虛集)> 발간하는 등 스승의 가르침을 나침반을 삼았다. 이에 앞서 1932년에는 <불교> 잡지에 ‘경허화상행장’을 번역한 찬(撰)을 싣기도 했다.

○… 한암스님의 생애에서 한국전쟁 당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일념으로 국군의 상원사 소각을 막은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작전상 이유를 들어 상원사에 불을 놓기 위해 온 국군 지휘관이 한암스님의 결연한 의지에 감복해 상징적으로 문짝만 떼어내 태우고 물러났던 것이다. 한암스님 입적 후 49일재인 1951년 5월 8일 부산 묘심사에서 봉행된 추모재에서 당시 월정사 주지 이종욱 스님은 “지난 겨울 아군이 재차 후퇴할 때에 사내(寺內) 100여 대중과 1600여 대중이 전부 떠나가고 깊은 무심공산(無心空山)에서 (한암)스님 한 분만이 희찬(喜贊) 수좌와 고독하게 계시다가 이 세상을 떠나 열반에 드시게 생각한 것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입니다”고 안타까워 했다.

○… 한암스님은 강릉 초등학교장을 지낸 조창환 불자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화두 참구의 수승함과 공부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전했다. <한암ㆍ탄허선사 서간문>에 실린 일부를 요약했다.

“항상 안심(安心) 정려(靜慮)하여 털끝만치도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지 마십시오, 더 나아가서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인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야 합니다. … 오로지 방법은 마삼근(麻三斤) 화두가 제일 묘방(妙方)이온데 잘못하면 최고의 음식도 도리어 독약이 됩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하십시오. 묘방은 거기에 있습니다. … 잡념이 조금이라도 없는 가운데서 화두를 들되, 재미도 없고 사량 분별도 할 수 없게 하여 참구하십시오. … 꼭 부처님 앞에서 참선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무를 보는 복잡한 가운데에서 득력(得力)하는 것이 적정(寂靜)한 곳에서 득력하는 것보다 10만 억 배나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로지 당사자의 신심이 얼마나 견고한가? 그것이 관건입니다.”

■ 수행이력 

1876년 음력 3월27일 강원도 화천에서 출생. 188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행름(行凜) 스님을 은사로 득도, 법명 중원(重遠). 1899년 여름 금강산 신계사에서 보조국사 수심결(修心訣) 읽다 크게 발심. 해제후 경허스님을 참례하고 견처(見處) 얻음. 음력 10월15일 해인사 퇴설선원에서 만물일여(萬物一如) 소식 깨닫고 경허스님에게 게송 보임. 1900년 통도사 백운암에서 입선(入禪) 알리는 죽비 소리 듣고 개오(開悟). 1904년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 추대 6년간 납자 지도. 1910년 묘향산 내원암, 금선대에서 안거. 1911년 맹산 우두암에서 안거. 1912년 우두암에서 확철대오. 1921년 금강산 장안사 지장암 주석. 1923년 서울 봉은사 조실, 1929년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추대. 1935년 조선불교수좌대회에서 종정 추대. 1941년 태고사(조계사)에서 종정 추대. 1948년 조선불교조계종 제2대 종정 추대. 1950년 한국전쟁 중 상원사 소각 저지. 1951년 음력 2월15일 오전 8시 좌탈입망. 세수 76세, 법랍 55세.

 

■ 어록 

   
한암스님 서한.

“깨달은 뒤의 주의할 점은 깨닫기 전보다 더 중요합니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을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깨달은 뒤에 만일 정밀히 수행하지 않아 태타(怠惰, 게으름)에 빠지면 여전히 생사에 유랑(流浪)하여 영영 헤어 나올 기약이 없게 됩니다.”

 - 1928년 경봉스님에게 보낸 서한.

 

“슬프다, 사람의 한 세상 삶이 아침 이슬과 같은지라, 백년 광음이 일 찰나 사이에 문득 지나가나니, 원컨대 모든 참선하는 고사(高士)들은 생각을 여기에 두고 부지런히 정진하기를 머리에 불이 붙은 듯하여 큰 일을 속히 이루기를 지극히 빌고 지극히 비노라.”

 - ‘불영사 수선사 방함록 서’에서. 1929년

 

“도(道)가 본래 천진하고 방소(方所)가 없으니, 실로 배울 게 없다. 만일 도를 배운다는 생각이 있다면 문득 도를 모르게 되나니, 다만 그 사람의 한 생각이 진실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또한 누가 도를 모르리오마는, 알고도 실천을 하지 않으므로 도에서 스스로 멀어지게 되나니라” - 1932년 탄허스님에게 보낸 답서.

 

“집집마다 전사(傳寫)하여 독송하고 집집마다 신해수지(信解受持)하여 함께 선근 종자를 심으며 함께 대원(大願)을 발하여 정혜를 닦아서 깊이 실상(實相)이 비상(非相)임을 통달하여 …”

- ‘금강반야바라밀경 중간연기 서(序)’에서, 1937년 

■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 

“수행자의 표상” 

   
지난해 열린 한암대종사 140주년 탄신다례재에서 인사말을 하는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 월정사는 매년 한암스님의 탄신일과 원적일에 다례를 봉행하고 있다. 사진=월정사 홈페이지

“한암 대종사는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격동의 세월 속에 계셨지만, 출가 수행자의 표상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는 5월3일 한암대종사 141주년 탄신 다례를 준비하고 있는 4교구본사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의 말이다.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은 불교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질곡의 세월에 한암 대종사는 시대적 아픔과 불교를 걱정하면서 선지식으로 시대의 등불을 밝혔다”면서 “스님의 가르침과 수행 정신, 그리고 사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정념스님은 “한암 대종사는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추대되는 등 네차례나 종정(宗正)을 역임하셨을 만큼 존경받았다”면서 “계정혜 삼학(三學)의 정신을 근간으로 수행 정진하며 불교의 근본 정신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겼다”고 밝혔다. “한국불교를 겸허히 돌아보고, 어려움이 닥쳐오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한암스님의 수행자적 삶의 자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를 바라 보았던 (한암 대종사의) 대안과 지혜가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요청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정념스님은 “일제강점기는 불교의 정신이 상당히 왜곡되고, 종풍(宗風)이 어려운 상황이었다”면서 “한암대종사는 근본주의 입장에서 불교전통을 계승하면서 격동의 시대에 등불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히 ‘승가오칙’은 승가가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수행하고, 화합승가를 구축하길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면서 “시대의 다양성을 지도하는 역량을 두루 갖춰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다”고 말했다.

“이 시대 한국불교의 지남(指南)과 미래의 표상(表象)을 한암 대종사의 가르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탄신일을 맞이하여 스님이 남기신 가르침과 정신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앞으로 큰스님의 가르침을 현창(顯彰)하는데 최선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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