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갈마’ 꿈꾸는 佛母…“부처님 조각할 땐 부처 되어야” (8월27일-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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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08-29 08:59 조회8,107회 댓글0건본문
세존은 도리천에 계셨다. 돌아가신 마야부인을 예경하고 석 달 동안 천인들을 위해 설법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상에서는 부처님이 계신 곳을 몰라 소동이 일었다. 코살라국의 우전왕은 부처님이 너무나 그리워 부처님을 대신할 불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자 비수갈마천이 내려와 전단향으로 불상을 만들었고, 우전왕은 조석으로 예불했다. 후에 부처님이 지상으로 내려오시니 불상이 부처님께 자리를 내어 드렸고, 이에 부처님께서는 불상을 바라보시며 “말세에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하셨다.-<증일아함경> 권28 외 다수 경전에 기록- 불상의 기원이다. 처음으로 불상을 조각한 이는 제석천의 신하인 비수갈마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불상을 조각하는 일은 비수갈마의 계보를 잇는 것이리라. 이 시대의 비수갈마를 꿈꾸며 사는 이가 있다. 40년 넘게 불상을 조각해온 경기도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제49호 한봉석(충북대학교 대학원 문화재과학과 겸임교수)이다. |
한봉석 목조각장은… 1972년 서울의 한 공예사에서 목조각을 시작했고, 1988년 문화재청 목조각 기능인 자격을 받았다. 1992년, 1994년 불교미술대전에서 입상, 2004년에는 특선했다. 1993년 불국조각원을 열었고, 2010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제49호로 지정됐다. 2012년부터 충북대학교 문화재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산 수덕사 금강역사, 원주 구룡사 삼존불과 닫집, 여수 향일암 불단, 영천 은해사 사천왕 외 다수가 있으며, 대한민국 전통문화재 조각회 회원전 25회 출품, (사)한국문화재 기능인협회 회원전 20회 출품, 나우회 정기전 6회 출품 외 다수 전시에 출품했으며, 개인전 ‘비수갈마를 꿈꾸다’를 개최했다. 〈완주 대원사 명부전 목조불상의 연구-공저〉 등의 논문이 있다. |
14세 목공예사 입사 조각입문
“불교조각, 불교부터 알아야”
독립 후 조계사불교대학 입학
1992년 불교미술대전 입상
14세에 나무와 칼을 만나다
경기도 남양주의 불국조각원. 폭염 속에서 칼끝이 쉴 새 없이 나무 위를 지나간다. 칼을 쥐고 있는 이는 한봉석 목조각장. 칼끝에서는 깎인 나무 조각들이 떨어져나가고, 떨어진 나무 조각들 위에는 굵은 땀방울이 떨어진다. 그리고 칼이 지나간 자리에는 나한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월정사 북대에 모실 오백나한목각후불탱이다. 작년부터 시작된 대작불사다.
“칼을 잡은 지 어느덧 40년이 넘었네요.”
비수갈마를 꿈꾸는 한 목조각장의 삶은 그가 목공예품을 제작하는 공예사에 취업하면서부터 시작된다. 1972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년 한봉석은 진학 대신 부친의 지인이 운영하는 서울의 공예사에 취업한다. 아직 세상이 업어주어야 할 어린 한봉석이었지만 그는 작고 여린 등으로 세상을 업어야 했다. 시대가 그랬다. 대부분의 삶이 다급했고, 주저할 시간이 없는 시대였다. 소년 한봉석이 일을 시작한 공예사는 목공예품을 제작하는 곳이었다.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작은 일들이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선배들이 그려준 도면을 일일이 손으로 그려 복사본을 만들었고, 하루 종일 선배들이 깎아놓은 조각품을 사포로 다듬어놓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도면을 그린 것이 저에겐 미술 수업이 되었고, 칼이 지나간 나무를 다듬으면서 나무와 조각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그의 작은 손에는 하루하루 상처가 끊이질 않았다. 1년여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도 마침내 사포를 놓고 칼을 잡기 시작한다. 한 목조각장이 어린 나이에 세상으로 나와 처음으로 만난 것은 바로 나무와 칼이었다.
천수천안을 보며 불모의 삶 시작해
천수천안.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다. 한 목조각장이 조각칼을 잡은 지 5년이 되던 1977년, 그는 이구예술원이라는 곳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곳은 불상을 비롯한 불교조각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불상, 즉 불교조각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만남이 바로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이다.
불자도 아니었고, 불교도 잘 몰랐던 한 목조각장이었지만 그에게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은 조각의 진지한 모티브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모티브는 조각가 한봉석의 영원한 테마로 이어진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한 목조각장에게는 의문들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틈틈이 책을 찾고, 선배를 찾고, 절을 찾았다. 그렇게 그는 불상과 불교조각 그리고 불교에 조금씩 다가갔다.
불상이나 불화를 조성하는 사람을 흔히 ‘불모(佛母)’라 부른다. 부처님을 만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 목조각장은 불모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로도 한 목조각장은 불상을 비롯한 불교조각을 계속하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조성하고 지장보살을 조성하고 문수보살을 조성한다. 하지만 작업이 계속될수록 불교조각에 대한 그의 의문은 그 깊이를 더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조성하면서 항마촉지인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고,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의 얼굴을 그들의 깊은 내력을 알지 못한 채 조성해야 했던 것이다. 늘 불사의 회향 끝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생업의 빡빡한 일정 속에서 그 의문들을 모두 해결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어지는 생업의 고단함 속에서도 틈틈이 그 의문들을 풀기 위한 노력을 놓지 않았고 그 의문들을 조금씩 풀어가면서 자신만의 불교조각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992년 한국불교미술대전에서 입상하며 불모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
조계사 불교대학 입학
1993년, 그는 불국조각원을 열며 독립한다. 그리고 그는 독립과 함께 또 하나의 발심을 하고 실천에 옮긴다. 조계사불교대학에 입학한다. 그가 그 동안 불교조각을 하면서 가지게 되었던 의문들은 불교를 모르는 데서 온 것들이었다. 풀지 못한 그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교부터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지신을 불러내시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심정에 다가가야 항마촉지인을 제대로 조각할 수 있고, 지옥이 텅 빌 때를 기다리는 지장보살의 심정이 되어야 지장보살의 표정을 조각할 수 있고, 미욱한 중생을 일일이 살피는 문수보살의 마음씨를 알아야 문수보살의 지혜로운 얼굴을 조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조각할 땐 내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어야 하고,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을 조각할 땐 내가 지장보살이 되고 문수보살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형상만을 조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도 없게 되는 날을 기다리는 지장보살이 되기 위해서, 근기에 맞게 중생들을 가르치는 지혜로운 문수보살이 되기 위해서 그는 불교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차츰 불교에 깊이 다가가게 되고, 더불어 불교조각에 깊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새 그는 불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불교가 보이고 불교조각이 보이면서 그는 우리 전통의 불상 조성 기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한 그는 2005년에 여주대학 도예과에 입학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의 학점은행제도를 이용해 학점을 쌓은 그는 2008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 입학하여 불교조각과 불교미술에 더욱 깊이 다가간다. 그렇게 한 목조각장은 어린 시절 품어왔던 의문들을 스스로 하나하나 풀어가며 불교조각에 매진한다. 예산 수덕사의 금강역사, 원주 구룡사 삼존불과 닫집, 여수 향일암 불단 등 전국 사찰에서 전승 작업을 통한 불사를 이어갔고, 대한민국 전통문화재 조각회 회원전 등 여러 전시회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며 불사와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제49호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나서부터 조각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하게 됐어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값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생각하니 그 동안의 세월을 모두 놓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0년, 그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제49호로 지정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는 자신의 조각이 이제는 ‘밥벌이’를 떠난 작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우선 그는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전형과 선조들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전국의 불상을 찾아 살피고 불교조각과 불교미술에 대한 문헌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비수갈마’라는 이름을 보게 된다. 한 목조각장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이 비수갈마의 계보를 잇는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는 또 한 번 자신의 조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하면 할수록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처음에 멋모르고 불상을 조각했던 시절은 차라리 쉬웠죠.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고요. 더구나 불보살의 세계를 조각하는 일이잖아요. 쉬울 수가 없는 것이죠. 쉬워서도 안 되고요. 칼을 들고 나무 앞에 앉으면 비수갈마가 부처님의 형상을 깎았을 때 어떤 마음으로 부처님을 깎았을지 궁금해져요.”
비수갈마의 이름이 가슴에 들어오던 날부터 한 목조각장은 또 하나의 원력을 세운다. 염부제의 비수갈마가 되기를.
불사와 작품활동 동시에…
경기도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지정
‘나우회’ 통해 유출문화재환수 동참
“염부제의 비수갈마 되고 싶어”
비수갈마를 꿈꾸다
“앞으로 여생을 제석천의 신하된 마음으로 부처님을 조각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비수갈마를 꿈꾸다’전을 준비했습니다.”
한 목조각장은 2015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한국문화재재단 전통공예관에서 ‘비수갈마를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남양주 흥국사 대웅보전의 목조광배를 비롯해 목조가섭존자상, 고려미술관의 목조불감 등 재현작 10여 점이 전시됐다.
그는 2010년부터 목조각을 비롯해 불화, 공예, 목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승 작가 15인으로 구성된 ‘나우회’를 결성했다. 나우회는 성보문화재 재현을 통해 불교미술문화재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있으며 특히 해외 유출문화재 재현을 통해 유출문화재 환수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단체다. 회장직을 맡고 있는 한 목조각장은 매년 나우회를 통해 자신보다 훨씬 먼저 비수갈마의 계보를 이었던 선조들의 전형을 재현하고 또 출품함으로써 성보 재현과 유출문화재 환수운동에 적극 참여함은 물론, 한 걸음 더 비수갈마의 계보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비수갈마를 꿈꾸는 것은 단순히 비수갈마를 흉내 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채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해야 하는 저로서는 부처님을 직접 뵙고 불상을 조성했던 비수갈마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랬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공부나 작업은 모두 좀 더 비수갈마의 계보를 더듬어 올라가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부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이어져 온 부처님의 얼굴을 더듬어 올라가 최대한 비수갈마의 시절에 가깝게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너무나 까마득한 세월이기에 혹자는 터무니없는 서원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모의 삶을 사는 한 목조각장으로서는 품을 수 있는 서원이라 생각된다. 부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우리 모두에게 불상을 모시는 불모의 존재는 모두 이 시대의 비수갈마인 것이다. 그러니 한 목조각장은 이미 비수갈마의 꿈을 이룬 것일 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2012년부터 충북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그의 후학들 역시 비수갈마를 꿈꾸는 불모가 되기를 기원한다.
한봉석 목조각장의 작품들
2014년부터 작업중인 오대산 북대 오백나한목가후불탱 |
고려미술관 목조불감 재현작 |
가섭존자상(왼쪽)과 목조당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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