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제가 스스로 일어나고 걸을 수 있는 한 변함없이 방문하여 여기에 서겠습니다.”
청산 법명(靑山 法明) 스님이 처음 방문한 대전교도소 재소자들에게 한 약속이다.(1981) 그에 대한 보답도 정중히 청했다.
“감옥에서도 바른 마음을 품고, 출소 후엔 늘 성찰하며 후회 없는 멋진 삶을 살아가 주세요!”
그 언약, 그 맹세 올곧이 지켜왔다.
대전교도소교정협의회 불교분과위원(1994)을 맡으면서 자살 등의 고충 상담, 수형자 취업 알선, 수용자 복지와 건강증진은 물론 불우수용자 가족까지 돌본 법명 스님이다. 종교를 초월한 재소자 봉사단체 ‘대전교정보호사업마하회’ 회장을 맡아 이끌었다. 1995년부터 수용자 1인1종교 갖기 운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는데 수용자 중 3000여명이 불교에 귀의했다.
또한 대전교도소 교정협의회장직(2011)을 8년 동안 맡으며 침체한 조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대전지방교정청연합회장(2016)을 4년 동안 역임하며 연합회의 위상도 격상시켰다. 아울러 교정위원중앙협의회장(2021)도 맡아 교정 일선에서 뛰는 위원들의 애로 사항을 해소하고 있다. 교화 불사 40년을 이어 온 법명 스님은 10월28일 제77회 교정의 날을 맞이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강화도 월곶리가 고향이다. 어머니는 어렵게 얻은 아이를 낳고는 세상을 떠났다. 하여 강화도 양도면 인산리의 황골 외갓집에서 컸다. 월곶으로 돌아와 강화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마음은 늘 외가 댁에 갔더랬다. 방학이 아니어도 산 넘고 들판을 가로질러 가며 30리 넘는 그 먼 길을 걸어 외할머니 품에 안기곤 했다.
청년으로 성장해서는 월정사 등의 유수 사찰을 순례할 정도로 불심이 돈독했다. 자신의 집 3층에 법당을 조성하고 정진했는데 염불‧목탁 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이 쌀을 이고 찾아왔을 정도다. 불연은 출가로 이어졌다. 관음종의 총 본산인 낙산 묘각사로 걸음 하여 삭발염의했다.(1978) 포교원장, 중앙종회 의장 등을 역임한 법명 스님은 지난 7월 관음종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충북 옥천에 자리한 백운사에서 법명 스님을 친견했다. 1981년부터 이 절의 주지 소임을 맡아왔는데 ‘나’를 묻어 버리려 작정하고 온 절이었다고 한다. 수행 정진에 매진하겠다는 결의였을 터다. 백운사 주변을 포행하던 중 ‘깔깔깔’ 웃으며 장난치는 동네 아이들에게 눈길이 쏠렸다.
“동네에 상투 튼 유생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지나가는데 ‘망태 할아버지다!’ 해요. 얼핏 보면 놀리는 듯한데 그들 사이에 오가는 친근함이 느껴졌어요. 그 아이들을 절로 불러서는 사탕 나눠주며 ‘정’을 쌓아갔습니다.”
어린이‧청소년 법회를 시작으로 백련학생회를 출범시켰다. 대한불교청년회 소속이기도 한 백련학생회는 유수 사찰을 순례하며 신심을 다져갔다.
“여름방학이면 아이들과 함께 절 마당에 앉아 그림 그리고, 냇가에서 물장구치고, 수제비도 끓여 먹었습니다. 해인사 가서 축구도 했어요. 주말에만 오던 학생들이 평일에도 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50여명의 학생들이 절 안에서 뛰어놀고 있더군요. 3일, 일주일 동안 집에 안 들어갈 요량으로 옷까지 챙겨오는 학생도 많았어요.”
대웅전과 산신각이 차면 아이들은 절 마당에 이불이나 방석을 깔고 누워 별을 세다 잠들었다.
방학이 아님에도 수십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와서는 며칠씩 머물다 가곤 했다. 점심시간 다가오면 수레에 아이들의 도시락을 싣고 학교로 향했다. 지금의 길은 복개 해서 편히 다닐 수 있는데 당시만 해도 개울을 건너야 학교에 이를 수 있었다.
하여 절은 늘 활기가 넘쳤다. 마냥 신나게 놀다가도 동생들이 곱하기 나눗셈을 물어오면 오빠, 언니들은 차분하게 가르쳐 주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미소가 절로 피었다. 아이들이 며칠씩 집에 돌아오지 않으니 항의차 방문한 학부모도 있었을 터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밥해 주고, 용돈 주고, 학교 보내고, 도시락까지 챙겨주었습니다. 공부도 시켰어요.’ 웃으면서 당부하더군요, ‘아이들, 너무 오래 있게는 마시고요!’ 아이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돌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아이는 못내 아쉬운지 어머니 손을 가볍게 잡고, 어머니는 안심한 듯 아이의 손을 꼭 잡더군요.”
법명 스님의 ‘아이들 사랑’ 소문은 이웃 군에까지 퍼지더니 보은 학생까지 찾아왔다.
대한불교청년회가 주관하는 제10차 전국불청대회는 백운사에서 열렸는데 참여 인원만도 200여 명이었다. 협소한 공간이어서 처음엔 행사를 치를지 머뭇거렸다. 천막이라도 치면 되겠지 하는 심정이었는데 백운사 청년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스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더니 포크레인을 끌고 와서는 땅을 파요. 어디서 구했는지 나무도 쌓아놓아요. 놀랍게도 42.9제곱미터(13평)의 임시 법당이 금세 세워졌습니다.”
청년들의 땀과 법명 스님의 세심한 배려로 불청대회는 원만히 회향했다. ‘해냈다’는 뿌듯함 때문이었을까? 법당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일까?
“청년들이 찾아와서 천불전을 짓겠다고 해요. 지금 당장 급한 불사가 아니라고 했는데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하고는 동분서주로 뛰며 화주를 하더군요. 청년들이 나선 덕에 많은 신도님이 도와주셨습니다.”
대전교도소 재소자들과의 인연은 명곡 ‘수덕사의 여승’으로 유명한 가수 송춘희 선생의 요청으로 닿았다.(1981) 숭산 스님으로부터 ‘백련화’ 법명을 받은 그는 보현행원, 삼귀의, 사홍서원, 산회가 등 20곡을 담은 찬불가 앨범(1983)도 선보였을 만큼 신심 돈독한 보살이다.
“‘대전교도소에 쌀 한 가마 보내 달라’고 부탁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그분의 신심은 대단합니다. 그 마음 아니 흔쾌히 승낙하고 대전교도소에 갔어요. 그런데 백련화 보살이 안 계셔요. 청송교도소로 가신 겁니다. 별수 없이 그날 재소자 법회에는 제가 참석해야 했습니다.”
법명 스님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기에 송춘희 선생은 걱정 없이 청송교도소로 갔을 터다. 감옥 안 켜켜이 설치된 문은 열릴 때마다 육중하면서도 차가운 금속성 소리를 내었다. 산중 사찰의 바람 소리에 익숙한 법명 스님에게 그 소리는 날카롭게 들렸을 터다.
법회가 시작됐다. 찬불가 반주에 얹힌 재소자들의 노랫소리가 법명 스님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어린아이들이 내는 맑은소리인 듯하면서도 간절함이 배인 호소력 짙은 음색의 찬불가는 저를 환희케 했습니다. 온몸의 솜털이 일었습니다. 그곳은 어느 법당보다 성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때 직감했고 확신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도 마음 한 번 돌리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날, 법명 스님은 재소자들에게 기동할 수 있는 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교정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1995년이지만 재소자를 향한 정성은 1981년부터 쏟아부은 법명 스님이다.
“한 청년에 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교도소 안에서 자살도 시도했을 정도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선고받은 5년이 500년 같았을 겁니다. 저를 보자마자 ‘제가 왜 스님을 만납니까?’하며 따져 물어요. ‘네 방에는 10년을 선고받은 사람도 있다. 이 감옥 안에는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징역을 살아야 하는 무기수도 있다. 그들에 비하면 너의 5년은 순간이다. 복역 기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시간으로만 생각 말아라. 바른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다지는 시간으로 여겨라. 너 자신이 착한 사람으로 변화하는 최소한의 시간이라고 생각해라. 진실로 참회하면 사면도 기대할 수 있다.’ 그의 눈빛이 잠깐이나마 빛났습니다.”
일주일 후 다시 찾았을 때 그 청년은 법명 스님 곁에 스스로 앉았다. 그리고는 “스님을 만나기 위해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아시느냐?”고 했다. 청년은 두 달 후 이감됐는데 그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교도소에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면 저에게 연락이 왔을 겁니다. 출소 후에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성실하게 살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명절 때마다 특식을 지원하고, 노트북을 비롯해 수용자 야외 운동기구, 상담실 내 냉‧온풍기는 물론 대강당의 방석까지 지원했다. 벌금을 못 내 출소를 못하는 사면대상자를 대신해 벌금까지 내주었다. 출감 직후 찾아오는 사람도 꽤 많았을 터다.
“고향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 용돈을 달라고 합니다. 손수레 한 대만 사 주시면 새 삶을 일구겠다고 합니다. 100만 원만 있으면 노점상을 열어 보란 듯이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쓰일 것인지는 모르지만 형편 닿는 만큼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갈 것이고, 그곳에서도 도와주지 않으면 곧바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오래된 이슈’인 사형제 폐지에는 “적극 찬성한다”고 했다.
“앙굴리말라(Angulimala‧손가락 목걸이)의 원래 이름은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의미의 아힘사입니다. 천명의 사람을 죽여 손가락을 모으면 수행이 완성된다는 말만 믿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무지에서 비롯된 우매한 선택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에 살인을 멈추고 출가했습니다. 탁발하러 간 앙굴리말라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지만 저항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감내할 과보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벌하려 한 국왕도 그를 직접 만나 보고는 ‘무력으로도 교화하지 못한 범죄자를 부처님 교리로 교화시켰다’며 찬탄했습니다.”
악인도 선인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형을 선고받을 만큼의 죄를 지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건 마땅합니다. 그러나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사형은 맞지 않습니다. 마음 한 번 돌리면 ‘새 사람’이라는 믿음과 그에 대한 가치를 인정할 때 우리는 정토를 일굴 수 있습니다.”
앙굴리말라의 일생에 대한 부처님의 게송이 떠오른다.
‘어쩌다 못된 짓을 했더라도/ 착한 행동으로 덮으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세납 88세에 이른 법명 스님은 오늘도 교도소로 걸음하고 있다.
새롭게 취임한 총무원장 스님에 대한 사부대중의 기대도 높을 것이다.
“종정 예하(홍파 스님)는 우리 종단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 원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작은 힘이라도 더해 종단과 불교중흥에 이바지하겠습니다. 우리 관음종은 관음보살의 원력을 본받고 실천하는 종단입니다. 미력하나마 저도 관음보살의 손과 눈이 되어 세상의 아픔을 감싸 안고자 합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법명 스님은
1978년 관음종 총본산 낙산 묘각사에서 득도했다. 포교원장, 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했다. 현재 법무부 교정위원중앙협의회 회장이자 관음종 총무원장이다. 대한민국한빛회 대한민국나눔봉사대상 교정봉사부문(2011), 국무총리 표창(2012),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교정봉사부문(2014), 교정대상 자비상(2017)을 수상했으며 2022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수필집 ‘바보산승 이야기’를 선보였다.
[1660호 / 2022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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