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무 ㅣ 부산 영산고 전직 교사

 

한국 고건축이나 조각사에서 불탑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문화사나 미술사는 기록에 의존하는 역사학의 범주를 넘어 문화재의 형태와 양식을 분석해 그것이 언제 어디서 제작됐는지 정확한 시대 편년과 계보를 밝혀 그 정체성을 찾아주는 학문이기도 하다. 필자는 고구려 다각다층탑을 계승한 고려 전기 월정사 팔각구층탑이 과거 고등학교 국정 국사교과서에 중국 송나라 영향을 받은 탑으로 왜곡되고, 현재 검인정 교과서에는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은 탑으로 설명되면서 계보와 정체성이 모호해진 사실을 바로잡고자 한다.

 

문자왕 7년(498)에 건립된 고구려 금강사지를 일제강점기 요네다 미요지가 측량 조사한 이래,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된 고구려 탑은 그 평면이 대부분 육각이나 팔각의 다각다층목탑으로 밝혀졌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사각 평면의 불국사 석가탑 계열의 탑이 전국에 걸쳐 보편적인 형태로 등장하지만, 호족세력 연합 정부의 성격이 강했던 고려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그 역사 문화적 전통과 연결된 서로 다른 형태의 탑들이 나타난다. 충청과 전라 옛 백제 지역에는 정림사지석탑 계열의 백제계 탑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옛 고구려 지역에는 현재 북한이 석탑으로 복원해놓은 고구려 정릉사 팔각칠층탑(북한 국보유적 184호) 형태의 고구려계 다각다층탑이 해당 지역의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태조 왕건이 고구려 고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표방하고 나라 이름까지 고려라 칭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물론 고려 월정사탑이 등장하는 시기를 전후해 중국에도 북송시대 개봉 우국사전탑, 요나라 불궁사목탑 등 다각다층탑이 건립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중국 송나라에서 다각다층탑이 건립되기 수백년 전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는 금강사나 정릉사를 비롯한 거대 사찰이 들어서고 여기에 다각다층목탑이 세워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는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중시했다. 이때 평양을 중심으로 옛 고구려 땅에 세운 고려시대 사찰에도 대부분 다각다층탑이 건립되는데 평양 영명사와 광명사, 영변 보현사, 평창 월정사 다각다층탑 등이 남아 있다. 이것은 월정사탑이 고구려계 고려 탑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만약 과거 국정교과서의 기록대로 월정사탑이 송나라계 탑이라면 고려 전기 다각다층탑 모두 송나라계 탑이 되고 만다. 지금 중국은 자국의 국경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시키려는 소위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훗날 통일 한국과 일어날지도 모를 만주(동북3성) 지역 영토 분쟁에 대한 준비라고 한다.

 

국정 국사교과서가 월정사탑을 송나라 계열의 탑으로 왜곡한 지도 수십년이 지났다. 그때 이후 우리 탑에 대한 누적된 연구 성과를 생각하면 역사학계는 그 오류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월정사탑은 현재 검인정 교과서에서 보는 것처럼 여러 나라 영향을 받은 탑으로서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지금이라도 우리 미술사학계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해 월정사탑의 계보를 송나라나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은 고려 탑이 아닌 고구려계 고려 탑으로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