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 숲길 지나 ‘雪의 전설’ 마주치다 (1월11일-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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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1-12 09:07 조회9,526회 댓글0건본문
▲ 폭설이 내린 오대산은 고요하다. 눈은 소리를 빨아들이고, 색을 지워버린다. 그래서 눈 내린 겨울 숲은 ‘진공의 흑백’이다. 오대산의 설경이 특별한 건, 실핏줄 같은 가지의 활엽수 사이로 전나무들이 우뚝 솟아 원근감과 긴장감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눈 찾아 떠나는 여행 ‘강원 평창’
올해는 어찌 된 게 눈(雪) 구경이 쉽잖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폭설 속에 갇히곤 했던 전북 부안과 고창 일대에도 눈 소식이 뜸합니다. 강원 산간지역에는 폭설이 몇 차례 쏟아졌지만, 따뜻한 날씨로 녹아버리는 바람에 백두대간의 산정(山頂)을 빼고는 눈 보기가 어렵습니다. 때아닌 겨울비가 내려 밤새 내린 눈이 겨울나무 가지마다 달라붙어 수정처럼 얼어붙은 경관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하기야 그런 풍경이 있다 해도, 폭설에다 기온까지 떨어지는 날이면 도로까지 다 얼어붙어 조마조마하니 좀처럼 눈 구경의 엄두를 내기 어렵기는 합니다만….
사실 눈 구경을 하기에는 엄동의 혹한보다는 요즘 같은 날씨가 딱 좋습니다. 눈이 드문 때에 강원 산간으로 떠나는 눈 구경을 제안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 날씨와 기온이 같이 받쳐줘야 하지만, 겨우내 그런 날 며칠쯤 없을라고요. 일기예보는 일단 ‘강원 산간에 눈’이어야 합니다. 폭설예보라면 더 좋겠지요. 그렇다고 매서운 추위가 몰려오는 날이라면 안됩니다. 산 아랫마을에는 비가 내리고 산정에는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그런 날이 눈 구경에는 안성맞춤인 날입니다.
목적지는 강원 평창. 겨울답지 않게 낮 기온은 6도까지 올라갔지만 ‘강원 남부 산간에 폭설’ 예보가 내려진 날이었습니다. 비로 촉촉하게 젖은 아스팔트를 밟아 오대산으로 들었습니다. 오대산이야말로 겨우내 폭설이 쏟아지는 곳입니다. 평창의 월정사 쪽도, 강릉의 노인봉 쪽도 눈이 내릴라치면 앞이 안 보이는 눈이 몇 날 며칠을 퍼부어 적막 속에 잠기는 곳이지요.
오대산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 눈부신 설경을 따라 걸었고, 길고 험한 고갯길을 넘어 겨우내 눈으로 고립무원이 되는, 한때 ‘전설’이었던 오대산 북쪽의 오지마을 부연동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한 계방산 아래 방아다리 약수의 전나무 숲길에도 들었습니다. 전나무 숲길에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그 숲을 길러낸 한 사람의 집념이 설경의 겨울 숲보다 더 명징했습니다.
# 눈부신 설경을 빚어내는 눈…습설
‘강원 산간에 폭설’. 기상청의 예보는 그랬지만 날이 푸근해서 영동고속도로 진부 IC를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보슬비였다. 눈이 잦은 평창 일대는 겨우내 도로 옆으로 밀어낸 눈이 무릎을 넘기는 게 보통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 겨울 진부면에는 눈이 없다. 그러나 강원 산간으로 ‘눈 구경’을 떠나기에는 이런 날이 으뜸이다. 산 아래는 비로 촉촉하게 젖지만, 산중에는 그득하게 폭설이 내린다.
눈 구경을 떠나기 전에 눈에 대한 상식 한 가지. 다 똑같아 보이지만, 눈의 종류는 두 가지다. ‘건설(乾雪)’과 ‘습설(濕雪)’이다. 둘을 가르는 건 눈이 수분을 얼마나 포함하고 있느냐다. 건설은 말 그대로 수분 함량이 40% 이하인 ‘마른’ 눈. 바람에 쉽게 날아가고 좀처럼 녹지 않는다.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에 주로 내린다. 습기를 머금은 습설은 이내 녹지만 나무에 축축하게 잘 달라붙는다. 스키를 타는 데는 건설이 으뜸. 그러나 겨울 숲의 눈부신 설경을 만들어내는 건 습설이다. 눈사람을 만들기에도, 순백의 눈 위에 발자국을 찍기에도 습설이 더 낫다.
그러니 눈 구경을 간다면 습설이 내리는 푸근한 날씨를 겨눠야 한다. 눈이 와도 혹한의 날씨라면 도로가 꽁꽁 얼어붙어 두근두근 위태롭다. 습설이 내리는 날이라면 미끄러운 도로 걱정도 덜 수 있다. 설경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기억해 둘 일이다.
# 월정사와 상원사…두 절을 잇는 길
▲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도보길 ‘선재길’의 눈부신 설경. 선재길은 ‘참된 나’를 깨닫는 길을 은유한다. 그렇다면 그 길을 걷기로, 겨울 숲이 눈으로 순백의 도화지가 되는 때만큼 적당한 시간이 또 있을까. |
진부면을 지나 오대산 쪽으로 접어들자 눈이 날렸지만 눈발은 성글고 풍경은 희미했다. 월정사 앞에도 간간이 진눈깨비만 날릴 뿐이었다. 눈이 내려서 적막으로 가득하리라 생각했던 월정사 전나무 숲도 눈은 바닥에만 있었다. 하기야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도 지난여름 쓰러진 나무를 말끔히 베어내고 곳곳에 예술작품을 설치하면서 자연스러웠던 정취가 영 예전만 못하다.
눈부신 설경은 월정사에서 오대산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시작됐다. 계곡을 끼고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8㎞의 계곡 속으로 들어서자 간간이 날리던 눈은 어느 사이에 함박눈으로 변했다. 겨울 오대산 최고의 설경은 이 계곡 위에 있다. 푸근한 날씨 탓에 계곡 물은 아직 얼지 않았고,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 주변은 함박눈이 내려 쌓이면서 온통 눈의 세상이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길이 특별한 것은 이 길을 차를 타고도, 걸어서도 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곡 이쪽으로 차로가 이어져 있고, 저쪽으로는 걷는 길이 있다. 따뜻한 차 안에서 나른한 음악을 틀어놓고 느릿느릿 차를 몰며 설경을 감상할 수도 있고, 계곡을 따라 놓인 도보길 ‘선재길’을 걸어 눈 쌓인 겨울 숲 속으로 들어설 수도 있다.
선재길은 60년대 말 상원사까지 도로가 놓이기 전에 월정사와 상원사의 스님이 교유하던 길이자 불교 신도들이 오가던 길이다. 월정사도, 상원사도 천 년을 헤아리는 고찰이니 길의 나이도 족히 1000년을 넘는다. 길에 ‘선재(善財)’란 이름이 붙은 건 오대산이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이가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 동자. 그러니 선재길은 ‘참된 나’를 찾는 깨달음의 길을 은유한다.
# 방아다리 약수에 늘어선 전나무들
▲ 방아다리 약수의 ‘밀브리지’. 나무 하나 다치지 않고 세운 숲 체험 공간이다. |
오대산국립공원에는 겨울 눈꽃 산행으로 이름난 계방산도 포함돼 있다. 국립공원의 경계는 계방산 남쪽의 발치 아래 방아다리 약수까지다. 지도를 펼쳐 보면 국립공원 구역이 남쪽으로 길게 뻗어서 방아다리 약수를 가까스로 품에 안은 형국이다. 방아다리 약수가 오대산국립공원에 포함된 데는 다 사연이 있다. 그 얘기는 뒤에 다시.
오대산의 설경 명소로 여기를 꼽는 건 약수로 가는 길에 도열한 전나무 때문이다. 오대산의 특별한 설경은 우람한 전나무에 힘입는다. 실핏줄 같은 가지마다 눈이 뒤덮인 활엽수 사이에 우뚝 솟은 전나무는 풍경에 원근감과 악센트를 준다. 침엽수 가지 위에 솜이불처럼 쌓였던 눈이 풀썩 떨어지는 모습의 정취라니….
방아다리 약수의 백미는 단연 들머리에 200m쯤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이다. 500년을 헤아리는 월정사 전나무의 웅장함에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정갈하고 가지런한 숲길은 낭만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산길을 걷는 수고 없이도, 애써 눈길을 아슬아슬 달리지 않아도 단번에 당도해 쉽게 둘러볼 수 있느니, 난이도는 최하. 게으른 여행이라면 설경을 즐기는 데 이곳 만한 곳이 없겠다.
국립공원 입장료는 폐지됐지만 방아다리 약수는 입장료를 받는다. 약수 일대가 개인의 사유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방아다리 약수에는 자연체험학습장 ‘밀브리지’가 들어섰다. 학교법인 대제학원 소유인 밀브리지는 나무 하나 건드리지 않고 방아다리 약수 전나무 숲에 미술관과 숙소, 레스토랑을 들여놓아 만든 독특한 문화공간이다. 소박하지만 세련된 공간의 설계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솜씨다. 전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 가득한 숲에 들어선 미술관이며 커피숍은 그윽한 정취로 가득하다. 계방산에는 잔설만 흩날렸지만, 마침 함박눈이라도 쏟아지는 날이었다면 밀브리지는 마법 같은 아름다움으로 빛났으리라.
# 한 사람이 노고와 정성으로 길러낸 숲
밀브리지가 들어선 뒤에 안 것이지만, 방아다리 약수의 전나무 숲은 한 사람의 노고로 이룬 것이다. 독림가이자 육영사업가였던 김익로(1993년 작고) 선생. 평양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던 거상의 일곱 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해방 이전 월남해 원주에서 살다가 강제 징용을 피해 이곳 방아다리 약수에 은신했다. 혼란의 와중에 약수 일대의 울창한 산림이 마구잡이로 베어지던 것을 못내 안타깝게 여겼던 그는 한국전쟁 무렵 방아다리 일대의 땅 1000만여㎡를 사들였고 그곳에 혼신의 힘을 다해 나무를 심었다.
그에게 기회가 온 건 사라호 태풍 때였다. 태풍으로 일대의 나무들이 모조리 쓰러지자 정부는 ‘하늘의 별따기’였던 벌채 허가를 내줬고, 그는 쓰러진 나무를 내다 팔면서 큰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또 산을 사들였고 나무를 심었다. 마음에 드는 숲이나 산이 매물로 나오면 그는 즉석에서 담뱃갑 은박지에 계약서를 쓰고 돈을 내주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사들인 산을 단 한 평도 팔지 않았다. 방아다리 약수를 국립공원에 편입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도 나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누군가 방아다리 약수의 나무를 몰래 베어가자 나무를 지키고자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을 걸 알면서도 국립공원 편입을 요구한 것이었다.
김익로 선생이 키워낸 건 나무만이 아니었다. 1957년에는 충북 제천의 대제중학교를 사들이면서 육영사업을 시작했다. 밀브리지는 대제학원 이사장직을 이어받은 맏딸 은정(54) 씨가 7년여의 준비 끝에 재단 소유로 세운 것이다.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건축과정에서 자연훼손을 최소화했으며 숲의 정취를 한껏 즐길 수 있도록 건물을 배치했다.
사실 밀브리지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다. 숲 속에 건축물이 들어선 걸 훼손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약수터 가는 길에 입장료를 받는 게 불편한 이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온 산이 다 황폐했던 시절에 신념으로 나무를 심어 우람한 전나무숲을 일궈낸 한 사람의 노고와 대접을 생각한다면 그쯤이야 무슨 문제가 될까 싶다.
# 눈 구경의 난이도 최상 코스…부연동
▲ 눈으로 뒤덮인 오대산의 전경. 멀찌감치 물러나 발왕산 정상에 본 모습이다. |
오대산에서 설경을 만나는 가장 낮은 난이도의 공간이 방아다리 약수의 밀브리지라면 ‘난이도 최상’은 오대산 북쪽의 오지 마을에 있다. 한때 오지의 전설처럼 불렸던 산중마을 ‘부연동’. 부연동은 오대산국립공원의 두로봉 북쪽에 있지만 행정구역은 평창이 아닌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다. 강원 산간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곳 부연동은 말 그대로 ‘눈 폭탄’이 떨어진다. 올겨울 들어 지금까지 두 번의 눈이 왔는데, 첫눈이 40㎝가 왔고 두 번째도 30㎝를 넘었다니 말 다했다.
부연동은 오대산과 황병산 사이의 낮은 목을 넘어가는 진고개 너머에 있다. 눈이 내리는 날이라면 일단 여기서부터 난관이다. 특히 진고개 정상에서 삼산리 쪽으로 내려서는 길이 길고 가파르다.
진고개를 넘어간 뒤 삼산리 마을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면 악명높은 전후치 고개가 나온다. 부연동을 전설의 오지로 만든 건 바로 이 고개다. 전후치란 이름은 오르는 길도, 내려서는 길도 똑같아서 앞(前)과 뒤(後)가 똑같은 고개라 해서 붙여진 것이다. 눈이 없어도 운전에 능숙하지 않다면 이 시멘트 도로 고갯길은 진땀이 다 날 정도다. 길이 워낙 거친 탓에 제설작업 1순위 도로지만 가장 익숙한 주민들이라면 모를까, 길 위에 눈이 보인다면 아예 넘기를 포기해야 한다.
부연동은 5년 전쯤 문 닫은 분교와 자태에 비해 이름이 좀 과하다 싶은 소나무 ‘제왕송’을 빼고 나면 이렇다 할 볼 게 없다. 부연동의 상징과도 다름없었던 산골학교 부연분교 운동장은 지금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겨울 부연동에서 봐야 할 것은 눈이다. 부연동에는 폭설이 쏟아지면 고립된다. 왜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눈에 깊이 파묻힌 산중 마을에서 모든 걸 잊고 숨어있고 싶을 때…. 그럴 때 가면 딱 좋은 곳이다.
부연동까지는 강릉에서 원일전과 어성전을 거쳐 돌아들어 가는 59번 국도도 있다. 거친 비포장 길이었는데 최근 포장작업을 마쳤다. 이 길로 가면 멀지만 대신 아슬아슬한 전후치를 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한번 눈이 오면 제설작업이 늦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눈이 오기 직전에 전후치를 넘어서 부연동 마을에서 눈을 만난 뒤, 눈이 녹을 무렵에 59번 국도로 나올 수 있다면 그게 눈 구경의 최적 코스다.
평창·강릉=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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