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려 수월관음도 (3월7일-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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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3-07 12:50 조회9,048회 댓글0건본문
▲ 수월관음도, 고려(1310년), 견본채색, 430×254㎝, 일본 카가미진자(鏡神社). |
얼마 전 신문에 관세음보살을 그린 고려불화 1점이 이탈리아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을 보았다. 고려는 불교가 융성하였던 시대였으니 분명 불보살님을 그림으로 그린 불화도 다량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강산이 변하고 사회지배 이념이 달라지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현재 남겨진 고려불화의 수량은 겨우 160여점에 지나지 않기에 머나먼 이국땅의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이지만 그 존재가 반가운 것이다.
바탕천은 1폭으로 이뤄진 비단
색감 안료도 모두 천연 광물성
엄청난 재물 소용된 귀한 물건
심미 아름다움 타의 추종 불허
부처님의 법을 믿는 불심에서 발원된 불화는 그 제작과정도 의궤에 의거한 엄격한 절차와 법식에 따라 진행된다. 불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향을 피우고 향료를 뿌려 그림을 그릴 장소를 청결하게 하고 불보살의 존상을 그리는 화사는 묵언수련에 가까운 절제된 행동으로 엄숙히 작업에 임한다. 불화가 그려지는 동안 송주스님들은 다라니를 외우며 정성을 드리는데 불화의 바탕이 되는 직물의 제작과정에도 경을 외우고 부정을 멀리하는 엄격한 법식을 거쳐야 완성될 수 있다. 불화제작의 절차와 그 과정에 기울이는 많은 정성 못지않게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소용되는 재물의 양도 적지 않다. 특히 세밀함과 색채의 조화 등에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고려시대 불화의 제작비용은 엄청나다.
조선시대 불화는 그림의 바탕이 되는 천도 비단, 면, 삼베 등 다양함을 보이고 제작되는 작품의 크기에 따라 바탕질은 여러 폭을 이어 마련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려불화의 바탕이 되는 천은 모두가 오직 1폭으로만 이루어진 비단이기에 이와 같은 바탕천을 마련하기 위해 불화제작 목적으로 특수한 베틀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그리고 그림에 색감을 나타내는 안료는 모두 천연 광물성 안료를 사용하는데 원석을 갈아 가루로 만든 다음 맑은 아교물을 부어 입자의 크기에 따라 분류하여 짙은 색과 옅은색을 내었다. 채색하는 방법도 그림의 뒷면에서 채색을 하는 배채법이기 때문에 그림 앞면에서 바로 채색을 한 작품보다는 안료의 양도 배로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시절이 좋아 신분계급이 없는 사회가 되어 일반인들도 박물관에만 가면 고려불화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제작과정에 엄청난 정성과 재물이 소용되었던 고려시대의 불화는 권문세족이나 왕족들이 개인의 원당에 안치하여 그들의 발복을 기원하는 용도로 쓰였기 때문에 아무나 접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일본 카가미진자에 소장된 고려 수월관음도는 그림을 보수하고 새롭게 표구하는 과정에서 크기가 줄어들었지만 1827년에 기록된 측량일기를 보면 당시 그림의 가로 높이는 500cm에 넓이는 270cm였다고 한다. 이 불화의 제작에는 8명의 화공이 동원되었는데 커다란 화면에 실로 거대한 보살의 형상을 나타내면서 관음보살이 몸에 걸치고 있는 천의의 투명함을 표현하기 위해 1㎜도 채 안 되는 가는 실선을 붓으로 덧 그려 넣은 섬세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세밀함을 보인다. 특수 제작된 베틀에서 비단을 짜서 바탕질을 마련하고 그 위에 노련한 화공 여럿이 동원되어 화려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이 작품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재물이 소용되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는 일반 백성들이 엄두도 못 낼 어마어마한 불사였기에 이 그림의 발원자는 일반인이 아닌 당시 왕실가족이었던 충숙왕의 후궁 숙비 김씨였다.
▲ 수월관음도, 중국 서하시대, 견본채색, 101.5×59.5㎝, 러시아 에르미타쥬박물관. |
고려시대 관음보살을 그린 작품에는 관음보살이 결가부좌의 형태로 그려진 것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경사가 급하고 험준하다는 보타락가산의 금강보석(金剛寶石) 바위에 한 발을 무릎 위에 올린 반가좌 자세로 부들로 짠 방석 위에 앉아 있고 그 맞은편에는 대부분 선재동자라 불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선재동자의 얼굴에는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가진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가득하지만 신도 신지 않고 수만리 구법의 길을 떠난 모습에는 선지식을 구하고자하는 굳은 의지와 열망을 엿볼 수 있으며 구부린 무릎에서 법을 청하는 공손함이 느껴진다. 선재동자는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두 무릎을 꿇고 법을 청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연잎 하나에 몸을 의지해 험한 바다 위에 떠 있는 형태를 그려내 구도의 험난함을 표현해 낸 작품도 있으며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1790년에 그려진 관음도에서처럼 험난한 구도길에 지치듯 야위고 갸날픈 몸매를 보이는 선재동자를 표현한 예도 있다.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지긋이 내려 보는 관음의 자세는 마치 발아래 선재동자와 눈을 맞추듯이 보이지만 실은 보살의 머리 위에 뜬 달이 물에 비친 모습 바라보는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 이는 인간이 갖는 환상의 허망함을 깨우쳐 주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 불화의 명칭은 수월관음도이다. 수월관음 도상은 중국 당나라시기에 창안된 새로운 불화도상으로 송과 원대에 특히 유행을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집중적으로 제작된 그림이다. 같은 주제로 그려진 러시아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소장된 서하시기의 수월관음도에도 고려 수월관음도와 같은 등장인물과 배경이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림이 주는 느낌은 성스러움이 충만한 고려 수월관음도와는 차이를 느끼게 된다. 관음보살의 발아래 선재동자의 등장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 그림이 바닷가에 접한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관음을 선재동자가 찾아가 설법을 들었다는 ‘화엄경’의 ‘입법계품’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 풀이한다. 따라서 고려의 수월관음도는 법을 찾아 나섰던 선재동자의 구도 여행길에서 28번째 선지식인 관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 대나무 숲과 바위 산, 청정한 계곡과 산호와 기화요초가 피어 있는 물가 등은 관음이 계시는 곳에 대한 신비감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나타낸다.
수월관음을 그린 고려 시대 불화들은 모두 교묘하고 섬려하며 종교화를 뛰어 넘어 심미적인 아름다움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실 불화는 경전과 사상을 그림으로 풀이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려지는 불보살과 권속, 그리고 존상들이 가지는 지물과 소도구는 정해져 있어 종교 미술의 필연적 특성인 도상의 경직성이 야기될 수 있다. 고려 관세음보살도 역시 경전의 내용을 도해한 것이라 경직된 모습의 형상이 그려질 수도 있었겠지만 두 눈을 아래로 지그시 뜨고 깊은 사색에 잠긴 관음의 얼굴은 속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성스러운 모습으로 사유에 잠긴 보살의 정신세계를 훌륭히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화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표현함에 있어 적절한 색채의 조화를 이용하여 극치의 화려함을 더하는 놀라운 기술로 우리의 선조님들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을 만들어 내셨다. 우리는 탁월한 심미안을 가진 조상님들 덕에 세계 최고라는 불화를 그려낸 민족으로 자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 그림들을 우리가 간직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아쉬움이 크다. 이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업무를 직업으로 갖고 있는 필자만의 서글픈 감상은 아닐 것이다.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 jini5448@hanmail.net
기사원문보기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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