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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庵大宗師舍利塔碑 小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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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5-01 15:23 조회6,3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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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庵大宗師舍利塔碑 小引
 
宗師의 俗姓은 李氏요 本貫은 完山이요 名은 應潤이며 別號는 海雲 或은 海觀 또는 古鏡이라고도 한다 父의 諱는 永이요 母는 慶州金氏다 檀紀四二一七年 甲申 正月 十三日에 江原道襄陽郡縣北面上光丁里에서 그의 次男으로 誕生하니 德興大院君의 十一代孫이었다 生後十三日만에 母親이 死亡하고 三, 四日이 지나도록 命이 保存되어 江陵 金氏敬允氏가 襁褓에 싸서 養育하니 마치 옛날 后稷이와 같은 奇跡이었다 十三歲에 明珠寺로 들어가서 白月老師께 歸依하여 得度하니 法名은 鍾郁이요 다음 雪耘長老에게 嗣法하니 法號는 智庵이었다 十六歲에서 二十七歲까지는 全國名山大刹의 여러 宗匠을 參禮하여 一代時敎를 修學하고 또 東大前身인 明進學校에 入學하여 外典을 卒業하였다 韓日合倂이 되자 三一運動에 參加한 後 二七決死隊를 組織하여 賣國賊의 暗殺을 圖謀하고 또 靑年外交團, 大韓愛國婦人會, 國民會 等을 組織하여 國內에서 地下運動을 展開하다가 中國으로 亡命하여 上海臨政의 內務部參事, 議政院議員, 聯通制特派員, 義烈團員 等으로 活動中 日警에 逮捕되어 咸興監獄에서 三年의 獄苦를 치르고 나니 때는 宗師의 四十一歲時였다 그후 月精寺에 住錫하면서 大伽藍이 負債關係로 거의 廢墟에 이름을 보고 慨然히 復舊할 뜻을 發하였다 總督府 高位官吏를 說得하여 府內에 月精寺財産整理委員會를 設置하고 三十本寺에 呼訴하여 義捐金을 얻음과 同時에 釋尊塔廟贊仰會를 組織하여 金溶禹氏의 喜捨金과 林産賣却代金으로 모든 負債를 淸算하고 아울러 國有林 千五百町步를 拂下받아 寺有로 만들었다 그리고 日本佛敎曹洞宗僧인 鈴木夫山이란 者가 博文寺를 建立하고 韓國佛敎三十本山을 거기에 領屬하려할 때 宗師는 隱密히 三十本山의 決議를 얻어 總本寺를 建立하고 代表가 되어 그의 陰謀를 挫折시켰다 宗師가 月精寺住持 三十五年餘에 하여 末寺管理, 布敎, 敎育 等 偉大한 業績은 擧論할 餘地도 없거니와 特히 漢岩宗正을 輔翼하여 二十餘年間 안으로 禪院을 外護하고 밖으로 總務院長 및 東大理事長 等을 歷任하면서 宗政을 領導해온 그 卓越한 眼目과 博厚한 力量은 누구도 追從을 不許했던 것이다 宗師는 護國佛敎의 精神을 躬行實踐하여 光復後에 反託運動의 江原道責과 大韓促成國民會總務部長으로 建國準備에 獻身하였고 第二代 國會議員에 被選하였으며, 大韓佛敎臨戰救國總聯盟委員長, 大韓傷痍軍人會會長 等 重責을 歷任하면서 民族을 爲한 盡忠報國을 하였다 己酉九月二十四日에 求禮華嚴寺에서 當時住持兼弟子였던 天雲 等에게 擧手微笑의 法門을 敎示하시고 奄然히 入寂하시니 世壽는 八十六이요 法臘은 七十三이었다 茶毗後 舍利六十四顆를 拾得하였다 戊午年十二月에 建國勳章國民章을 追敍받고 翌年十一月에 銅雀洞 國立墓地 愛國志士墓域에 舍利一部를 安置하고 餘分은 月精寺浮屠塔에 奉安하게 되었다 舍利는 總譯하면 靈珠다 別稱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一은 精聚요 二는 骨神이요 三은 不思議다 모두가 三學을 修習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宗師의 一生을 通해 愛國愛族의 一念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그 滔滔한 急流中에서도 三學의 修習이 主體가 되었었던 行迹은 누구도 否定할 수 없는 事實일 것이다 上來의 敍述한 幼時의 奇跡과 壯年의 雄志와 老境의 事業과 死後의 行迹은 前으로 百載의 旣往과 後로 百載의 方來에 이와 같은 領導的인 人物이 佛敎史上 다시 있기 어려우리라고 斷定되는 것이다 이제 塔을 建立함에 즈음하여 그 門徒 靑空, 臥雲 等이 囊貯를 기울이고 現住持 萬化의 協贊을 얻어 浮屠를 세우게 되었다 宗師의 略傳을 가져와 나에게 碑文을 請하거늘 내가 敢히 不文으로써 牢讓할 수 없는 處地일 뿐 아니라 萬人의 口傳이 그대로 碑文이기 때문에 右와 같이 十의 一, 二인 事實만을 略述했을 따름이요 枝葉的인 文辭는 힘쓴 바가 없노라
應化 三千六年 己未 菊月 二十四日
漢岩門人 呑虛 金宅成 謹撰幷書
【번역】
스님의 속성(俗姓)은 이씨요, 본관은 완산이요, 이름은 응윤(應潤)이며, 별호는 해운(海雲), 또는 해관(海觀), 또는 고경(古鏡)이라고도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영록(永彔)이요,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다. 단기 4217년 갑신 정월 13일에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에서 그의 차남으로 탄생하니, 덕흥대원군의 11대손이다.
태어난 지 13일만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3, 4일이 지나도록 목숨이 보존되어 강릉 김경윤(金敬允)씨가 감싸 길렀다. 이는 옛날 후직과 같은 기적이었다. 13세에 명주사로 들어가 백월(白月) 노스님께 귀의하여 계첩을 얻으니 법명은 종욱(鍾郁)이다. 그 후 다시 설운(雪耘) 노스님의 법을 이으니 법호는 지암(智庵)이었다.
16세에서 27세까지는 전국 명산 대찰의 여러 큰스님을 참방하여 일대시교를 수학하고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에 입학하여 외전을 두루 배웠다. 한일합병이 되자, 삼일운동에 참가한 후 27결사대를 조직하여 매국노의 암살을 꾀하였고, 또 청년외교단, 대한애국부인회, 국민회 등을 조직하여 국내에서 지하운동을 전개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의 내무부 참사, 의정원 의원, 연통제 특파원, 의열단원 등으로 활동 중 왜경에 체포되어 함흥 감옥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당시 스님의 나이 41세였다.
그 후, 월정사에 주석하면서 대가람이 부채관계로 거의 폐허가 되는 것을 보고서 개연히 복구할 뜻을 내었다. 이에 총독부의 고위관리를 설득하여 부내(府內)에 월정사재산정리위원회를 설치하고 30본사에 호소하여 의연금을 얻음과 동시에 석존탑묘찬앙회(釋尊塔廟贊仰會)를 조직하여 김용우의 희사금과 임산물 매각대금으로 모든 부채를 청산하고, 아울러 국유림 천오백 정보를 불하 받아 사찰 소유로 하였다.
그리고 일본불교 조동종 승려인 영목부산(鈴木夫山)이란 자가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고 한국불교의 30본산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려 할 때, 스님은 은밀하게 30본산의 결의를 얻어 총본사를 건립하고 대표가 되어 그의 음모를 좌절시켰다. 스님은 월정사의 주지를 35년 여 지내면서 말사의 관리, 포교, 교육 등 위대한 업적은 거론할 나위도 없거니와 특히 한암 큰스님을 보필하여 20여 년 동안 선원을 보살펴 주었고, 밖으로는 총무원장 및 동국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종정(宗政)을 이끌어 온 그 탁월한 안목과 크신 역량은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었다.
스님은 호국불교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광복 후 반탁운동의 강원도 총책과 대한촉성국민회 총무부장으로 건국준비에 헌신하였고 제2대 국회의원에 피선하였으며, 대한불교임전구국총연맹위원장, 대한상이군인회 회장 등 중책을 역임하면서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기유년(1969) 9월 24일, 구례 화엄사에서 당시 주지 겸 제자인 천운 등에게 손을 들어 미소를 지어 법문을 보이시고 홀연히 열반하시니 세수는 86이요, 법랍은 73이었다. 다비 후 사리 64과를 수습하였다. 무오년 12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고, 그 이듬해 11월에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사리 일부를 봉안하고 나머지 사리는 월정사 부도탑에 봉안하게 되었다.
사리는 총체적인 의미로 번역하면 신령한 구슬이다. 이를 따로 번역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기의 결정체요, 둘째는 신령한 뼈요, 셋째는 불가사의이다. 이 모두가 3학(三學)을 닦은 결정체라는 면에서 보면 일생을 통한 애국애족의 일념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그 도도한 급류 중에서도 3학의 수행이 주체가 되었던 행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위에 서술한 어릴 적의 기적, 장년의 웅지, 노경의 사업, 사후의 행적은 앞으로 백세의 지난날과 이후로 백세의 미래에 이와 같은 영도자가 불교역사상 다시 있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이제 탑을 건립함에 그의 문도 청공, 와운 등이 경비를 마련하고 현 주지 만화의 협찬을 얻어 부도를 세우게 되었다. 스님의 약전(略傳)을 가져와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에, 내 감히 문장이 용렬하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할 수 없는 처지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전 그대로가 비문이기에 위와 같이 십분의 1, 2인 사실만을 약술했을 뿐, 지엽적인 문장에는 힘쓴 바 없다.
불기 3006년(1979) 기미 9월 24일
한암문인 탄허 김택성 삼가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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