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의 苦惱를 宗敎에 묻는다(4)_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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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3-13 15:05 조회7,089회 댓글0건본문
〔4〕 성인과 범부
그러면 인간성이나 불성(佛性)이나 다 똑같은 자리인데 어째서 ‘인간성이다’, ‘불성이다’, ‘신성(神性)이다’ 하고 구별하는가? 성인은 알고 쓰기 때문에 불성․신성이라 하고 우리 범부는 성(性) 자리를 모르고 쓰기 때문에 인간성이 됩니다. 결과적인 면에서는 인간성과 불성이 둘이 아닙니다. 단 쓰는 데 있어서 성인은 성(性) 자리에 앉아서 쓰는 것이고 범부는 정(情) 자리에 앉아서 쓰는 것이지요.
성(性)을 ‘중(中)’이라고도 하고 ‘도(道)’라고도 하는데, ‘도’라는 것은 사람이 당연히 갈 길이라는 말입니다. 또 그것을 ‘덕(德)’이라고도 하는데, ‘덕’이라는 것은 ‘마음에 닦아 얻은 진리[得於心之謂德]’가 아닙니까? 또 그것을 ‘진리’라고도 하는데, 진리라는 것은 모양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온갖 대명사가 다 나오지만 대명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가리키면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봅니다. 결국 대명사란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 다른 술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대명사, ‘도(道)’라는 대명사, ‘진리’라는 대명사 등 온갖 대명사가 많이 나오지만 그 모두는 성(性) 즉 본성의 자리를 지적하는 다양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예컨대 ‘김탄허’라고 할 때 ‘김탄허’는 대명사이지 김탄허의 실물은 아닙니다. ‘김탄허’라고 할 때 못 알아들으면 ‘동국대학교 선원장(禪院長)’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대명사 아닙니까?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오대산 주인’이라 하고,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우리 아버지 이름을 빌어 ‘아무개 아들’이라 하고, 또 못 알아들으면 우리 형님 이름을 빌어 ‘아무개 아우’라고 합니다. 김탄허다, 동국대 선원장이다, 오대산 주인이다, 누구 아들이다, 아무개 아우다라고 하는 것이 모두 대명사이지 실물은 아닙니다. 김탄허의 실물은 이렇게 생긴 이것이에요. 그 자리는 명사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이처럼 성(性) 자리는 본래 명자(名字)로 얘기할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성이나 불성이나 차이가 없지만 성인은 성(性) 자리를 알고 쓰니까 하루 종일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을 써도 칠정이 도로 없는 데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범부는 시공이 끊어진 이성(理性) 자리를 모르고 쓰니까 항상 망상에 허덕이면서 고해(苦海)에 났다 빠졌다 하는 것입니다.
윤태림 : 보통 저희 같은 사람들은 범부로서 여러 가지 떳떳하지 못한 것을 떳떳한 것으로 알고 고락(苦樂)에 헤매지만 선승들은 그것을 어느 정도 초월했다고 보는데, 범부도 성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탄허 : 그렇지요. 성(性) 자리를 타파하면 즉 견성(見性)하면 됩니다. 유교의 학설도 수천 권을 종합해 보면 ‘존심양성(存心養性)’ 혹은 ‘진심지성(眞心知性)’입니다.
맹자(孟子) 「진심장(眞心章)」에 “진기심자(盡其心者)는 지기성야(知其性也)니 지기성즉지천의(知其性則知天矣)니라” 즉 “그 마음을 극진히 연구하는 자는 그 성리(性理)를 아나니, 그 성리를 알면 천리(天理)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또 불교학 수천 권을 종합해 놓고 보면 ‘명심견성(明心見性)’ 즉 마음을 밝혀 성을 본다는 것이고, 도교(道敎)의 학설 수천 권을 종합해 보면 ‘수심연성(修心練性)’ 곧 마음을 닦아서 성(性)을 단련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교의 수련(修練)이나 유교의 존양(存養)이나 불교의 명견(明見)이나 다 심성(心性)을 가지고 얘기한 것은 똑같아요. 다만 ‘밝혀서 본다(明見)’, ‘두어 기른다(存養)’, ‘닦아 단련한다(修練)’는 그것이 학술적으로 조금 차이는 있겠지요. 그러므로 고조사(古祖師)의 말씀에 “유교는 뿌리를 심는 것이라면 도교는 뿌리를 북돋워 주는 것이요, 불교는 뿌리를 뽑는 것[儒植根, 道培根, 釋拔根]”이라 했습니다. 심고 북돋우는 것은 점진적이겠지만 뿌리를 뽑고 보면 심고 복돋울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을호(유학) : 마음으로는 그가 그렇게 되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안타까워했는데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인간성 회복이라고 할까, 그 한계점은 결국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얘기지만, 유교에서는 직접 갈 수 있다고 보니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이 아니겠느냐 라고 생각합니다.
탄허 : 기독교에서 우리 인간은 피지배인이고 하나님은 지배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물론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삼위일체, 즉 성부(聖父)․성신(聖神)․성자(聖子)의 일체는 예수님 말씀이 아니고 그 제자들이 그 뒤에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전개한 말이긴 하지만 대단히 좋은 말이거든요. 예수님이 어째서 예수님이냐 냉정하게 규명해 본다면 삼위일체가 되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즉 예수님의 성자(聖子)가 성부(聖父) 자리․성신(聖神) 자리와 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우러르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같은 의미의 술어가 많습니다. 즉 법(法)․보(報)․화(化) 삼신(三身)이 하나라는 거죠. 법신(法身)이 성부 자리이고 보신(報身)이 성신 자리이고 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이 성자 자리입니다. 비유컨대 천강(千江)에 비치는 달그림자가 화신(化身)이라면 달의 광명은 보신(報身)이며 하늘에 있는 달은 법신(法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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