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의 苦惱를 宗敎에 묻는다(3)_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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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2-17 17:23 조회7,769회 댓글0건본문
〔3〕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
부처님이 49년 동안 그렇게 횡야설수야설(橫也說竪也說) 혀가 닳도록 설법해 놓고서 한 글자도 얘기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성(性) 자리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 성(性) 자리의 대명사가 굉장히 많습니다. 유교에서는 ‘중(中)’이라고 합니다. 중(中)이라는 것은 복판이 중(中)이 아닙니다. 여기에 앉아서 보면 서쪽이 되고 그쪽에 앉아서 보면 동쪽이 되고 이쪽에서 앉아서 보면 북쪽이 되고 저쪽에 앉아서 보면 남쪽이 되는데 어떻게 중이 됩니까? 중앙의 중(中)이 진중(眞中)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서울이 한국의 중앙이 아닙니다. 충청도에서 보면 동쪽이고 함경도에서 보면 남쪽이고 강원도에서 보면 서쪽인데 어떻게 중(中)이냐 이것입니다.
그러면 중(中)이 무엇이냐 하면 시간․공간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에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중(中) 즉 희노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을 위지중(謂之中)이라”고 함과 동시에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근본, 우주의 핵심체”라고 한 것입니다. 또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것도 시공이 끊어진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우주는 시간․공간을 의미하는 것인데 시간․공간이 나기 전, 우주가 생기기 전에 계신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분이 우주창조주인 하나님인데 그분이 시간․공간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性) 자리에서 본다면 전부가 다 그 본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양보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인에게 즉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공자님한테 양보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은 성인이나 범부나 똑같이 갖고 있으니까요. 다만 중생, 즉 범부는 성(性) 자리를 ‘미(迷)’했기 때문에 못난 놈 노릇하는 것이지, 성은 다 똑같은 존재라고 성인들이 말씀한 것 아닙니까?
기독교의 ‘산상수훈편’에도 마음을 비우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을 비우는 자가 바로 성(性) 자리를 각파(覺破)하여 시공이 끊어진 자리 아니겠습니까? 또 「마태복음」인가에도 “네가 돌이켜서 동자(童子)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날 수 없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동자가 된다는 것은 성(性) 자리 즉 분별없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성(性) 자리를 타파한 도통군자라는 말은 아니고, 동자의 천진함을 비유로 든 것이지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골약근유이악고(骨弱筋柔而握固)하며, 미지빈모지합이전작(未知牝牡之合而全作)은 정지지야(精之至也)요, 종일호이익불사(終日號而嗌不嗄)는 화지지야(和之至也)” 즉 어린아이는 “뼈는 약하고 근육은 부드럽지만 주먹을 꼭 쥐고 있고 음양(陰陽)의 교합(交合)을 모르면서도 생식기가 빳빳한 것은 정기(精氣)가 지극한 것이요,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음은 화기(和氣)가 지극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시간만 울어도 목이 잠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심(有心)이고 어린애들은 무심(無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중용(中庸)'에 “화야자(和也者)는 천하지달도야(天下之達道也)라”고 했습니다. 즉 ‘화(和)’라는 것은 하루 종일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을 써도 쓴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중(中)의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는 그렇게 안 되거든요. 도통(道通)한 사람이 아니고는 진정한 ‘화(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중용(中庸)'에 “치중화(致中和)면 천지위언(天地位焉)하며 만물(萬物)이 육언(育焉)이라” 즉 “중화(中和)의 도를 자기 마음 가운데 성취하면 천지가 나에게 있고 만물이 저절로 길러진다”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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