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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의 苦惱를 宗敎에 묻는다(1)_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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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11-12 16:02 조회2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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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대의 고뇌 보편적으로 내재한 종교심(宗敎心)


윤태림 : 제가 사회를 맡아서 얘기의 실마리를 풀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떠한 문제이든 간에 얘기를 시작하면 반드시 정의(定義)부터 내리게 됩니다. 종교라는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초인간적인 것에 대한 생각이라고 일단 정리를 내릴 수 있겠지요. 종교라고 하면 으레 특정한 조직이나 시설 혹은 의식이 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인간에게 어떤 종교심(宗敎心)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유교(儒敎)라는 것이 종교적인 범주에 들어가는지 의문이고, 이것은 하나의 실천도덕에 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일 종교를 초자연적인, 초인간적인 하나의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면 유교는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문제보다도 적어도 어떤 종교를 믿건 간에 인간에게는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보편적으로 어떤 종교심이라는 것이 내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유물론자들, 맑스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라 하고 프로이트같은 사람은 공포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정의하지만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종교심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보편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나 기독교, 또는 유교라는 종파를 떠나서 종교심이라는 것이 인간성과는 별개 문제의 것, 성스러운 것, 신성(神性)이라고 볼 때에 인간에게는 인간적인 것, 동물적인 것이 존재하는 동시에 반드시 신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불교, 기독교, 유교에서 종교심을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말씀해 주시면 앞으로의 얘기가 진전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탄허 스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탄허 : 제가 전에 청담(靑潭) 스님한테서 들은 얘긴데 불교건 기독교건 무엇이든 간에 종교는 내 마음이며, 내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해요. 부처님 형상 앞에 예불을 올리고 절을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내가 이렇게 부처님을 믿음으로 해서 가령 병을 고칠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는 말씀을 해서 저희 같은 문외한도 납득이 갔습니다.

이을호(유학) : 제가 한마디 거들렵니다. 인간의 종교적 심성(心性)에 대해서는 불교의 입장에서 말씀해야 되겠고, 초인간적인 어떠한 신(神)이라는 면에서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말해 주셔야 되겠고, 유교는 중간에서 어느 곳에 넣을지 모르기 때문에 순서로 봐서 불교의 입장부터 말씀을 꺼내 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탄허 : 송곳은 끝부터 들어가고 쌀을 까불면 겨가 먼저 나갑니다. 지금 인간의 종교적인 심성(心性)의 문제 즉 기독교로서는 신성(神性)과 인간성에 대한 것, 불교로서는 불성(佛性)과 인간성에 대한 것이 이야기되는 것 같습니다. 
심(心)이라고 하면 성(性)과 정(情)을 합한 명사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나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즉 우주가 나눠지기 전을 말합니다.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나 몸이 나기 전이나 우주가 생기기 전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마음의 본체를 성(性)이라고 할 때,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성인이나 범부나 똑같다는 말은 성(性)의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지 그냥 덮어놓고 똑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性)이 마음의 본체라면 정(情)은 같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말하자면 한이 없지만 철학적으로 그것을 구별하면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칠정(七情)이 됩니다. 그러나 성(性)은 칠정이 일어나기 전 면목이며 본래 언어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굳이 말한다면 큰 강령(綱領)으로 불교에서는 사덕(四德)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마음자리에 갖춘 사덕, 즉 진상(眞常)․진락(眞樂)․진아(眞我)․진정(眞淨)입니다. 유교에서는 그것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하는데 범부와 소승(小乘)은 이 사덕을 거꾸로 봅니다. 
어떻게 거꾸로 보느냐하면 범부는 이 세상은 무상(無常)한 것인데 그것을 상(常)으로 즉 영원한 것, 한결 같은 것으로 봅니다. 백년 미만의 몸뚱이를 가지고서도 천년이나 만년을 살고 갈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범부입니다. 또 세상이라는 것이 전체가 고(苦) 덩어리인데 이것을 낙(樂)으로 보며, 이 세상 전체가 무아(無我)인데 그것을 아(我) 곧 실체(實體)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또 이 세상은 전체가 부정(不淨)인데 깨끗한 것으로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범부의 네 가지 그릇된 견해, 즉 범부의 사도(四倒)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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