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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이타정신(利他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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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10-29 11:18 조회8,1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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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利他精神

종교의 목적은 사회와 중생을 제도하는 데 있다. 이것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중불교에 있어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함도 결국은 이 종교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요 가르침이다. 먼저 불타의 진리를 체득하여 자기 자신의 인격을 원만하게 완성시켜서 자신을 제도하고, 그 원만한 인격의 힘으로 사회와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함으로써 복지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상구보리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자기제도(自己濟度)의 자리행(自利行)이요 하화중생은 복지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타행(利他行)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기 자신의 구제, 즉 최고 경지를 성불 또는 해탈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체의 세간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롭게 됨을 뜻한다. 불교의 8만4천이나 되는 많은 경전도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해탈의 길을 가르치는 법문인 것이다. 물론 이 8만이란 숫자가 수적인 한량(限量)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보다 많고 크게 폭을 넓히고 있다.

불교의 진리는 티끌 하나도 버리지 않는 전 우주적인 것이다. 이러한 무한무량(無限無量)의 사상은 대승불교가 싹트면서 현저하게 나타난 것이다. 소승불교에 있어서는 오직 자기 몸 하나밖에 없다. 자기 몸 하나만이 문제의 대상이었고 목적의 대상이었다. 이웃과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사상에 있어서는 일미진중(一微塵中)에도 함시방(含十方)이라고 한다. 즉 먼지 하나, 물 한 방울 속에도 모든 진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한 티끌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시방(十方)의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함은 해탈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말하는 중생이란 물론 인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과 곤충까지라도 하나도 빠짐없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한 티끌, 한 마리의 미물이라도 경솔하게 대하거나 다루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진리, 즉 불법이 들어 있고 한 마리의 짐승이라도 장차 인연을 만나면 ‘부처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남을 존중하고 일체를 귀중하게 여기는 대승불교사상은, 나(我)만을 위하고 고집하는 현대인들에게는 크게 주목할 만한 교훈이다. 오늘의 사회는 인정이 메말라 자기의 이익과 자신의 안락밖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아만과 아집과 독선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흔히 그 이유가 요즈음의 경제난과 식량난에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인간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정신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의 인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세계적인 불안과 공포 속에서 시련을 겪고 있다. 그 결과로 인간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인정이 메말라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의 사명, 아니 불교의 이타(利他)사상은 이런 때 발휘되어야 한다. 오늘날 과학문명과 기계문명, 그리고 의학기술은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또한 물질 만능도 더할 수 없이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불안을 제거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역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고, 외면적인 해결이 아니라 내면적인 해결이 있어야만 오늘의 사회, 현대의 중생은 불안과 고통에서 해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교인은 하루빨리 불타의 진리를 체득하고 원만한 인격을 완성한 뒤(自利) 그 인격의 힘으로 이 사회를 불국토화(利他) 하는 데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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