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의 세계_1. 화엄경을 만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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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9-19 11:10 조회8,746회 댓글0건본문
華嚴經의 世界
1.『화엄경』을 만나던 시절
내가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온 것은 22세 때이다. 처음 3․4년 간은 일체 경전이나 문자를 보지 않았다. 그것은 선방의 당연한 관례였고, 또 선방에 온 사람으로서 당연한 자세였다. 그런데 얼마를 지나자 우리 스님이신 한암(漢巖) 노화상께서 나에게 이렇게 권하셨다.
“도(道)가 문자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아는 사람은 일단 경(經)을 봐야 한다.”
몇 번인가 권하셨다. 스님께서는 내가 문자에 빠질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의 성장을 위하여 반드시 부처님의 경교(經敎)와 조사의 말씀을 보라고 권하셨다.
당대에 대강사는 박한영(朴漢永)스님이었다. 나는 스님의 말씀에 따라 박한영스님에게 가서 경을 배우기로 하고 편지를 냈더니 “한암스님 같은 대덕고승을 모시고 있는 분이 나에게까지 배우러 올 것은 없소.” 하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그러나 그것을 불구하고 떠나기로 하자 스님께서 온갖 준비를 해 주셨다. 그 때 내 나이 24세였다.
그런데 때마침 강원도 지사인 손영목(孫永睦) 씨가 주동이 되어 강원도 삼본산 승려연합수련소를 오대산 상원사에 개설(1936)하게 되었다.
손영목 씨는 유명한 도지사였다. 비록 일제 치하에서 도지사를 지냈지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자 그는 지사직을 내동댕이치고 끝내 그 이름을 지켰던 사람이었다. 그가 강원도내 3본산(유점사, 건봉사, 월정사)에 권하여 한국불교의 중견승려를 양성하기 위한 수련원을 오대산 상원사에 개설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에 수련소가 개설되자 조교(助敎), 즉 중강(中講)이 필요했다. 조교의 적임자로 내가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원으로 떠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한문을 배웠다는 탓도 있거니와 다들 나를 아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선방만 있을 때는 경(經)을 볼 생각을 안 했지만 선원이 수련소가 되었으니 경을 볼 수 있는 터라, 그럴 바에야 스님 밑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수련원 개설이 되던 날은 손 도지사와 당시 중추원 참의(參議) 몇 사람이 참석하였고 수련생은 약 30명이 되었다. 오늘의 고암(古庵)스님이나 서옹(西翁)스님도 그 때의 일원이다. 수련소의 일과는 조석으로는 참선을 하였고 낮에는 경을 배우고 외우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도 많은 경전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사집(四集)은 독학하였고 그 밖의 경전은 스님으로부터 배웠는데『전등록(傳燈錄)』과『선문염송(禪門拈頌)』까지 완전히 마치기까지는 만 7년이 걸렸다.
수련소의 정규과정은『금강경』과『범망경』이었지만 나는 별도의 경을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화엄경』을 볼 때에 이르러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청량소(淸凉疏)』를 보느냐 이통현(李通玄)의『화엄론』을 보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수련생들의 요청에 의하여 보조(普照)선사의「수심결」과「원돈성불론」등『보조어록』을 석사(釋辭)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원돈성불론」에서 화엄과 선의 차이가 분명한 것을 보았던 터라 다들 말하기를 통현장자의『화엄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 때 함께 지내던 탄옹(炭翁)스님이 더 역설하였다.
“이 기회에 우리가『화엄론』법문을 듣지 않으면 다시는 들을 기회가 없을 것이니 꼭 들어야 합니다. 강당에서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니 이 때에『화엄론』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했던 것이다.
그 무렵 회중에 허몽성(許夢惺)스님이 계셨다. 몽성스님은 함양(咸陽)에서 면장을 하다가 늦게 출가하였는데 나이는 60이 넘었었다. 그래도 정정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그 분의 부인도 와 있어서 외호를 하였다.『화엄론』으로 교재를 정하자 책이 문제였는데 몽성스님의 부인이『화엄론』10여 질을 시주하였다. 아마도 그 때 가격이 한 질에 10원이었던가 한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 때 많은 대중들이 함께 청강하였다. 나는 그 때 대중 앞에서 경문을 새겨 나갔다. 그 다음에 스님(한암)이 감정하시고 또 모르는 것은 묻고 대답하며 진행하였다. 끝에 다시 한 번 토(吐)를 달아 읽어 내려가면 그 때에 다들 토를 달았다.『화엄경』과『논』을 합해서 120권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읽어 나갔는데 꼭 열한 달이 걸렸다.
그 다음에『전등록』과『선문염송』을 공부하였다. 역시 내가 새겨 나가고 스님께서 감정하시고 강을 하시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는데, 그 때에 총무원장 이종욱(李鍾郁)스님이 오셔서 방청한 적이 있었다. 이종욱스님은 당시의 수련원을 둘러보고 크게 찬탄하였으며 내가 석사하는 것을 보시고 나에게도 과한 찬탄을 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해서『전등록』과『선문염송』까지 짬지게 보아나갔다.
그 때 스님(한암스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꼭 이『화엄경합론』을 토(吐)를 달아서 출판 보급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또 스님께서는 “『화엄론』은 참선하는 사람이 아니면 볼 근기가 못 된다.”고 말씀하셨다. 40년이 지난 근년에 내가『화엄경』번역을 완료한 것은 그 때의 우리 스님의 부촉이 종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스님의 부촉에 몇 배를 더 해서 완성한 셈이다.
『화엄경』을 번역하게 된 직접 동기는 지금부터 25년 전(1956년)이다. 그 때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설립하여 30여 명에게 강의하고 있었다. 수도생을 위하여 화엄학을 중심으로 교수하고 있었는데 그 기초 과정으로『영가집(永嘉集)』․『기신론(起信論)』또는『능엄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다음에『화엄경합론』을 공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강으로 노장학(老莊學)이나 주역(周易) 등을 간간이 했었다.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되었는데 종단 내부의 분규로 중도에 와해되었다. 그 때 수도생들을 위하여 준비한 교재가『화엄경합론』이었다. 그 뒤 일을 진행하면서 총 17년이 걸렸는데, 마지막『논․소』를 합하여 정리하는 데만 만 9년이 걸렸다.
원래 화엄의 정신을 밝혀내는 데는『화엄론(華嚴論)』으로 만족하지만 자구(字句)를 세밀하게 살펴가는 데는 불가불『청량소(淸凉疏)』를 빼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화엄경』을 현토번역하고 또『화엄론』과『청량소』를 곁들이는 방대한 사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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