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烏大宗師浮屠碑銘 幷小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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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5-12 13:10 조회6,908회 댓글0건본문
師의 俗姓은 鄭氏니 本貫은 東萊요 諱는 太田이며 金烏는 其號也라 李朝建陽元年丙申七月二十三日巳時에 生於全南康津郡兵營面朴東里하니 父의 諱는 用甫요 母는 趙氏니 二男三女中第二男也라 夢鶴有脤에 生而不凡하야 巍巍乎山岳之氣象이요 恢恢乎河海之胸襟이라 年纔十六에 超然有出塵之志하야 遂入金剛山摩訶衍禪院하야 依道庵亙玄禪師祝髮하고 至二十八歲時에 更晉忠南禮山報德寺寶月會上하야 有個入處하니 其頌曰 透出十方界하니 無無無亦無라 個個只此爾니 覓本亦無無라하다 寶月禪師는 爲滿空和尙之上首弟子而不幸早世故로 滿空老師 代以嗣法으로 印之하니 其頌曰 德崇山脈下에 今付無文印이라 寶月下桂樹에 金烏徹天飛라하다
師旣嗣承於寶月法脈則於鏡虛老師에 爲三代孫也라 自爾로 以四無量心으로 爲受用處하며 以一切法平等으로 爲所住處하야 或逍遙於深山伽藍之中而不出世間하고 或放曠於都市烟塵之際而不入世間이라 隨時隨處에 生熟이 自在하니 古人所謂若非打發得幾人이면 佛法이 豈到今日者 安知非師之眞境也耶아 若夫衲子之提接과 外國之遊覽과 淨化之佛事等은 非徒昭載於行狀與年譜라 於師之分上에 皆是塵垢粃糠이니 則何足掛於唇脗也哉아 七十二歲時에 萬緣을 休廢하고 入俗離山法住寺하야 至翌年戊申八月十七日에 奄然入寂하시니 世壽는 七十三이요 法臘은 五十七也라 門徒之如龍若虎者 不可枚擧而嗣法揚化에 頗有超師之作者는 惟月山禪伯也라 拾其奢維之靈骨하야 立浮屠而奉安之하고 又收錄其平日法語偈頌逸話等若干語하야 付諸流通하니 觀鳳一羽에 足以知五彩之成章이니 則何必多哉아 可謂能事畢矣로다 然有塔而無碑 竊爲後人之遺憾故로 一日에 囑余爲銘하야 以傳不朽어늘 余雖不文이나 不敢以牢讓이라 故敍其顚末如右하고 仍付之以一言하노라 自其異者而視之인댄 肝膽이 楚越也어니와 自其同者而視之인댄 萬物이 皆一也니 旣已爲一矣인댄 且得有言乎아 旣已謂之一矣인댄 且得無言乎아 言與無言이 二俱非니 俗離山色이 暮雲中이로다 繼爲之銘曰
拔華之姿여鐘精而生이라
自少挺特에學不可窮이로다
志超雲外에早脫塵緣이라
三業精勤하야偏弘禪觀이로다
圓明寂照에體本靈通이요
應物現形에空而不空이로다
神頭鬼面도未測其幽어니
石火電光인들豈能爲喩아
放去綿綿이요收來密密이라
棒喝交馳에臨機縱奪이로다
毛錐記德이雖如兒戱나
不有辭章이면曷傳來世아
泰山崩矣라七衆安仰이며
棟梁摧矣라四部安倣가
塔銷俗離에卽事卽理니
百世後人이惟是所依로다
應化 三千二年 乙卯
五臺山人 呑虛宅成 謹撰幷書
【번역】
스님의 속성(俗姓)은 정씨(鄭氏)이니 본관은 동래요, 이름은 태전(太田)이며, 금오는 그의 법호이다. 이조 건양 원년(1896) 병신 7월 23일 사시에 전남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이름은 용보(用甫)요, 모친은 조씨(趙氏)이니 2남 3녀 가운데 제2남이다. 모친이 학의 태몽을 꾸고서 낳았다. 스님은 태어나자마자 비범하여 산악과 같이 우람한 기상이 있었고 바다와 같이 넓은 가슴을 가졌다.
나이 16세에 출가하려는 높은 뜻을 가지고 마침내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 들어가 도암긍현(道庵亘玄) 선사에게 삭발하고 28세 때에는 다시 충남 예산 보덕사 보월회상(寶月會上)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시방세계를 벗어나니
무도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다
낱낱이 모두 이러한 것이니
근본을 찾아봐도 없다는 것마저 없어라
보월선사는 만공스님의 수제자인데 불행스럽게 일찍 열반한 까닭에 만공 노스님은 그를 대신하여 금오스님을 사법제자(嗣法弟子)로 인가하셨다. 만공스님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덕숭산 산자락에서
이제 글 없는 도장을 전해 주노라
보배 달이 계수나무에 내리고
황금 까마귀, 하늘 높이 날아라
스님은 이미 보월선사의 법맥을 계승하였는 바, 경허스님의 3세손이다.
그 후,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수용처를 삼고 일체법의 평등으로 주석할 곳을 삼아 때로는 깊은 산중의 가람에 거닐면서 세간을 벗어나지 않았고, 때로는 도시와 번거로운 세속에서 꺼림 없이 머물면서도 세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모든 일에 자유자재하였다. 옛 사람이 말한 “도를 얻은 몇몇 큰스님이 없었다면 불법이 어떻게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라는 구절은 바로 스님의 참다운 경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납자의 제접(提接), 외국의 유람, 정화의 불사 따위는 행장과 연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스님의 본분에 있어서 티끌이요, 쭉정이와 같은 일이다. 어찌 다시 이를 말할 것이 있겠는가.
72세에 모든 인연을 끊으시고 속리산 법주사에 들어가 그 이듬해 무신년(1968) 8월 17일에 열반하시니 세수는 73이요, 법랍은 57이다.
문인 가운데 뛰어난 제자들을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나 법을 잇고 교화를 펴매 스승보다 뛰어난 이는 오직 월산선백(月山禪伯)이다.
다비 후 사리를 수습하여 탑을 세워 봉안하였고, 또 스님의 법어와 게송, 일화 등을 수록, 간행하여 이것이 널리 전해지고 있다. 이는 봉황의 한 깃털만 보고서도 오색영롱한 아름다운 빛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많은 것을 필요로 하겠는가.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마쳤다고 말할 만하다.
하지만 부도탑은 세웠으나 비명이 없으면 후인들의 유감이 될 것이다. 어느 날 나에게 비명을 지어 후대에 전하기를 부탁하기에, 내 문장에 능하지 못하나 감히 이를 사양할 수 없어 그 전말을 위와 같이 서술하고 아울러 한 마디 말을 덧붙이는 바이다.
“그 다른 점으로 보면 한 몸의 간과 쓸개도 초나라 월나라처럼 멀게만 느껴지지만 같은 점으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이미 하나라면 여기에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미 하나이다 하면 또한 할 말이 없을까? 말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 둘 다 모두 잘못된 것이다.
속리산의 푸른빛이
해 저문 구름 속에 묻혀 있다.
이어 명문을 붙이는 바이다.
빼어난 그 모습
정기를 타고 태어나셨네.
어려서부터 빼어나
학문은 더할 것이 없었네.
포부는 구름 밖에 드높아
일찍 세속을 벗어났네.
삼업(三業)을 부지런히 닦으셨고
선관(禪觀)을 더욱 넓히셨네.
둥글고 밝고 고요하고 비춤에
본체가 본디 신령하고 통하며
사물을 응하고 형체를 나타냄에
공이로되 공이 아니다.
귀신 머리와 귀신 얼굴로도
그 그윽함을 헤아리지 못하거니,
전광석화인들
어찌 비유할 수 있겠는가.
놓으면 끊임없고
거둬들이면 촘촘하여라.
몽둥이와 억 소리가 치달림에
기틀에 따라 놓아 주고 뺏는다.
붓끝으로 덕을 기록함은
어린아이의 희롱과 같으나
문장에 말과 글이 있지 않으면
어찌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태산이 무너졌으니
칠중(七衆)이 누구를 우러러볼 것이며
대들보가 꺾였으니
사부대중이 어디에 의지하랴
탑이 속리산에 잠겼으매
사법계가 곧 이법계라
백세의 후인들이
오직 이에 의지하리라
불기 3002년(1975) 을묘 월 일
오대산인 탄허 택성 삼가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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