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齋高基業先生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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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9-01 08:55 조회6,467회 댓글0건본문
古之葬者는 不封不樹하니 葬之有銘은 非古矣라 然이나 必其賢者也니라 世之皆有銘也도 又非古矣라 然이나 亦必其賢者也니라 是故로 非其人而銘之면 君子不與也요 銘之而非其實이면 君子不爲也니라 先生姓은 高氏니 籍出濟州하고 諱基業이요 字는 士洪이니 蘭齋는 其號也라 盖自始祖開創以來로 至于居鄕히 代不乏賢而麗朝之文忠文英兩公은 尤其著者也라 考의 諱는 啓炫이니 歷中樞院議官하고 妣는 達城徐氏度賓之女며 江陵金氏議官振守之女니 先生은 則繼夫人金氏之所出也라 李朝高宗辛丑三月十一日에 生于蔚山蘭谷里하니 自幼로 篤受庭訓하야 孝友를 行于家하고 忠信이 著于鄕하며 勤儉以持身하고 急難以周人하며 至於奉先衛道之事하야는 累世墓儀를 無一不備하고 各所儒宮을 獨力修補하니 富而無驕도 尙爲難이어든 況富而好禮者乎며 積而能散도 猶爲難이어든 況散而能忘者乎아 又能於幹辦社會各界重任에 無不負焉하니 如三一會館과 酒造協會等이 盖其大者也니라 不翅此也라 尤有用心於出世之道하야 恬澹이 息於內하고 蕭散이 揚於外라 其身兮若拘나 其心兮若泰하야 現形容於寰宇호되 潛幽靈於法界라 是以로 或放曠於酒肆都市之間而不入世間하고 或逍遙於名山伽藍之中而不出世間하야 縱橫淋漓에 生熟이 自在하니 可謂在世間出世間하야 第一等討便宜之者也로다 壬子七月三十日에 入寂于正寢하니 享年이 七十有二니라 配는 興驪朴氏正憲大夫奉煥之女라 育男女各一하니 男은 卽台鎭이니 現朝興銀行長이요 女는 適達城徐壹敎總務處長官하다 孫은 源駿․東源․源道․源采․源宗이요 曾孫은 亨相․範相․禎相․榮相이요 外孫은 範鼎이니 餘不具錄이라 先生이 雖治生於商工之業이나 然이나 謹守世代相傳儒素之義訓하야 子孫이 不出其規範하니 亦人所難能者也라 囑余爲銘커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據其行狀與鄕人之所傳하야 略敍其顚末如右云爾로다 銘曰
肉眼觀之에肝膽이 楚越이어니와
慧眼觀之에萬物이 皆一이로다
性相이 常住에萬古休猷니
生順死安에復何疑兮리오
后之視今이猶今視昔이니
不有辭章이면曷表其德가
后之視后猶后視今이니
立石千秋에令人所瞻이로다
應化 三千一年 甲寅 月 日
五臺山人 呑虛 金鐸聲 撰幷書
【번역】
옛적의 장례는 묘소를 높이 쌓지도 않았고 비석을 세우지도 않았다. 묘소에 비명을 쓴 것은 옛 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자에게는 묘비명을 썼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묘비명을 쓰는 것 또한 옛 법도가 아니다. 그러나 또한 어진 자에게는 썼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닌데 묘비명을 쓰려고 하면 군자는 참여하지 않았고 비명을 쓰되 그 사실대로 하지 않으면 군자는 쓰지 않았다.
선생의 성은 고씨요, 본관은 제주이며, 이름은 기업이요, 자는 사홍이며, 난재는 그의 아호이다. 그 시조가 처음 태어난 이후로부터 그 고을에 살기까지 대대로 어진 사람이 나왔으며, 고려조 문충공, 문영공 두 분은 더욱 그 중에서도 훌륭한 선조이시다.
부친의 이름은 계현이니,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고, 모친은 달성서씨 도빈의 딸이며 강릉김씨 의관(議官) 진수의 딸이니 선생은 바로 후실인 김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다.
이조 고종 신축(1901) 3월 11일에 울산 난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받아 집에서 효도와 우애를 행하고 고을에 충성과 믿음이 나타났으며 근검으로 몸가짐을 가지고 어려운 일을 보살펴 남을 도왔으며, 선조를 위하고 도리를 지키는 일은 여러 대의 묘소에 석물을 모두 갖추었고, 여러 곳의 향교와 서원 등을 혼자의 힘으로 수리, 보수하였다.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은 것도 어려운 일인데 더욱이 부를 누리면서도 예를 좋아하며, 재물을 쌓아 놓고 재물을 베푸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더욱이 재물을 베풀면서도 그 일조차도 잊는 것이야 말할 것이 없다.
또한 사회 각계의 중임을 도맡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예를 들면 ‘삼일회관’과 ‘주조협회’ 등이 그에 있어서의 큰 일들이다. 뿐만 아니라 출세간의 도에 마음을 두고서 편안하고 담담한 마음가짐으로 마음을 쉬고 고요한 삶이 밖으로 나타나니, 그 몸은 구애받은 것 같지만 그 마음이 태연하며, 그의 몸은 세상에 살면서도 그윽한 마음은 법계에 잠기었다. 이 때문에 주막과 도시에 살면서도 세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명산과 가람에 소요하면서도 세간을 벗어나지 아니하여, 사방으로 막힘 없이 모든 일에 자유자재하였다. 이는 세간에 있기도 하고 세간을 벗어나기도 하여 제일의 편의를 도모한 자라 하겠다.
임자(1972) 7월 30일에 정침에서 서거하니 향년이 72이다. 부인은 흥려박씨(興驪朴氏) 정헌대부 봉환의 딸이며, 아들과 딸은 각각 하나이다. 아들 태진은 현 조흥은행장이요, 딸은 달성 서일교 총무처 장관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로는 원준, 동원, 원도, 원채, 원종이요, 증손은 형상, 범상, 정상, 영상이요, 외손은 범정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선생은 상공업을 경영하였으나, 대대로 전해 온 유교의 가르침을 삼가 지키어 자손이 그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 또한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에게 비명을 부탁하기에 나는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고 굳이 사양할 수 없어 그의 행장과 고을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근거하여 대략 그 전말을 위와 같이 서술한 것이다.
명문은 아래와 같다.
육안으로 살펴보면
한 몸의 간, 쓸개도 초월(楚越)이지만
지혜의 눈으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체성과 형상이 항상 머물매
만고에 아름다운 법이니
순리대로 살고 편안히 죽음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후인이 오늘을 보는 것은
오늘 사람이 옛 사람 보는 것 같다
문장으로 남기지 않으면
그의 덕을 나타낼 수 있으랴
후인이 후대를 보는 것은
후인이 오늘을 보는 것 같다
천추에 비석을 세워
모든 이로 우러러보게 하노라.
불기 3001년(1974) 갑인 월 일
오대산인 탄허 김택성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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