聽雨堂大禪師舍利塔碑 小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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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6-03 09:59 조회6,807회 댓글0건본문
聽雨堂大禪師舍利塔碑 小引
師之俗姓은 楊氏요 本貫은 淸州요 法名은 景雲이니 聽雨는 其號也라 壬子八月二十五日에 生於平南成川郡崇仁面昌仁里하니 父의 諱는 學善이요 母는 張氏也라 纔十二歲에 入於全北淳昌龜岩寺하야 依映湖長者得度하고 自此로 於曠於金剛五臺京山等地하야 於禪於敎에 雙修竝行하야 竟嗣映湖長老之法脈하니 於白坡에 爲八世孫也라. 師之才는 如干將莫耶하야 隨其所試에 皆迎仞而解하고 師之志는 如長川逝河하야 信其所趣에 雖百折不回하며 師之節은 如堅松古柏하야 必歲寒而後見하고 師之業은 如深林邃谷하야 必窮探而始知니라 捲將窮髮垂天之翼하야 謾向搶楡者且機時耶라 嗚呼라 千里之足이 困於伏櫪이요 連城之璧이 或混瓦礫이니 不琢其章인들 於璧에 何傷이며 不駕以驤인들 奚損於良이리오 宿抱素負를 有志未就하고 辛亥八月十五日에 奄然入寂하니 歲壽는 六十이요 法臘은 四十八也라 茶毗拾得舍利四十三顆하야 半分은 安置於大興寺碑殿하고 餘分은 奉藏於法王寺入口하다. 舍利者는 總稱則靈珠며 別稱則有三義焉하니 曰精聚며 曰骨神이며 曰不思議也니 盖精修三學之緖餘也니라 其門徒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朽어늘 余不敢以不文而固辭故로 敍其顚末하야 以示來者하노라 其詳은 具在大興寺碑文하니라
應化 三千六年 己未 八月 二十五日
五臺山人 呑虛宅成 撰幷書
【번역】
스님의 속성은 양씨(楊氏)며 본관은 청주요, 법명은 경운(景雲)이며 법호는 청우(聽雨)이다. 임자년(1912) 8월 25일, 평남 성천군 숭인면 창인리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학선이요 어머니는 장씨이다. 나이 12세에 전북 순창 구암사의 영호스님에게 계첩을 얻고 금강산, 오대산, 경산 등지를 행각하면서 선지와 교학을 두루 닦아 결국 영호스님의 법맥을 이으니 백파율사 8세손이다.
스님의 재주는 간장, 막야 명검과 같아서 모든 일에 막힘 없고, 스님의 의지는 장강, 대하와 같아서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두어도 백 번 굽이쳐 흘러도 물길이 돌아가지 않으며, 스님의 절개는 소나무, 잣나무 같아서 어려움을 당해도 변치 않으며, 스님의 사업은 무성한 숲, 깊은 골짜기와 같아서 모두 살펴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북해의 하늘을 뒤덮을 날개를 거두고, 부질없이 느릅나무 숲으로 가기도 했던 것은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던가.
아! 천리마가 천박한 마구간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몇 개의 성과 맞바꿀 수 있는 구슬이 자갈 속에 묻혀 있다. 그 구슬을 다듬지 않는다 한들 구슬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며, 천리마에 멍에를 채워 달리지 않는다 한들 천리마에게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오랫동안 품은 재주와 포부를 이루지 못한 채, 신해년(1971) 8월 15일에 입적하니 세수는 60이요, 법랍은 48세이다. 다비 후 사리 43과를 수습하여 절반은 대흥사 비전(碑殿)에 봉안하고 나머지는 법왕사 입구에 봉안하였다.
사리란 총체적인 의미로 번역하면 신령한 구슬이다. 이를 따로 번역하면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정기의 결정체요, 둘째는 신령한 뼈요, 셋째는 불가사의이다. 이 모두가 3학을 정밀하게 닦은 결정체이다. 그 문도들이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여 길이 전하고자 하기에, 나는 문장을 능하지 못한다 하여 굳이 사양할 수 없기에, 그 사실을 서술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한다. 그 밖의 자세한 것은 대흥사의 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불기 3006년(1979) 기미 8월 25일
오대산인 탄허 택성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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