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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의 苦惱를 宗敎에 묻는다(2)_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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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12-23 13:54 조회7,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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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덕(四德)과 사전도(四顚倒)

또 소승들은 어떻게 보는가? 진상(眞常)․진락(眞樂)․진아(眞我)․진정(眞淨)을 전체가 무상(無常)이고 전체가 무락(無樂)이고 전체가 무아(無我)이고 전체가 부정(不淨)한 것으로 보는 것이 소위 소승들의 사전도(四顚倒)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부는 현실에 집착해서 사덕(四德)을 전도한다면, 소승은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사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덕은 범부의 사전도(四顚倒)와 소승의 사전도를 떠나서 완전한 진상․진락․진아․진정인 것입니다.

진상(眞常) 즉 진리는 참으로 변함이 없으며, 진락(眞樂) 즉 진리는 고(苦)가 없어 참으로 즐겁고, 진아(眞我) 즉 진리는 참으로 멸(滅)하지 않는 자체의 나(我)이며, 진정(眞淨) 곧 진리는 참으로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의 사덕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범부는 성체(性體)가 혼연한 우주의 진면목, 시간․공간이 끊어진 이 마음의 본체를 알지 못하고서 밤낮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慾)의 칠정에 끌려 다니다가 생을 마칩니다. 칠정으로써 일생을 보내는 것이 범부라면 성(性)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성인입니다.

‘마음(心)’이라 하면 성(性)과 정(情)을 합한 명사 즉 체용(體用)을 모두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性)은 본체이고 정(情)은 거기서 일어나는 작용이지요. 정(情) 자리에 앉아서 보면 온갖 차이가 있어서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고 잘난 놈도 있고 못난 놈도 있고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고 흰 것도 있고 검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性) 자리에서 보면 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별․득실․시비가 다 끊어집니다.

마음(心)은 총체적인 명사인데, 마음자리에서 보면 마음은 성인의 마음, 범부의 마음, 악한 마음, 착한 마음 등의 온갖 마음이 다 있지만 즉 온갖 것이 다 붙을 수 있지만 성(性) 자리에는 선악․시비의 분별이 붙지 않습니다. 굳이 말을 붙인다면 유교에서는 “지극히 착하다[至善]”로, 또 불교에서는 선악이 끊어지고 시간․공간이 끊어진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자리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을 총체적인 명사로 바다에 비유한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인 희․노․애․락․애․오․욕의 7정(七情)은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입니다. 파도가 일어남에 따라 청탁(淸濁)이 갈라집니다. 맑은 물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탁한 물은 배를 엎어서 사람을 죽이는 못된 작용을 합니다. 그렇지만 젖는 성질 자체는 불변입니다. 성인의 마음을 맑은 물이라 한다면 범부의 마음은 탁한 물입니다. 그러나 물이 맑다고 더 젖고 흐리다고 해서 덜 젖는 것이 아니고 물의 ‘젖는’ 성(性)은 청탁을 떠나서 물이 본래 갖고 있는 것이지요. 성인의 마음이건 범부의 마음이건 똑같은 그 성의 원리를 깨달아서 범부가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물의 젖는 성질 자체에서 본다면 하루 종일 바다에 바람이 불어 흙탕물이 쳐도 하나도 손해가 없다 이 말입니다. 밤낮 젖는 것인데 거기에 청탁이 어디에 붙습니까? 젖는 자체에는 청탁이 붙지 않습니다.

불성(佛性)이라 할 때에 ‘불(佛)’이라는 말은 ‘각(覺)’이라는 뜻입니다. ‘각(覺)’은 ‘미(迷)’의 반대말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난 것이 ‘미’라면 한 생각 일어나는 곳이 없는 줄 확연히 본 것을 ‘각(覺)’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바다에 바람이 일어난 것을 ‘미(迷)’라고 할 수 있는데, 바닷바람이 일어났다는 것은 바다 자체를 ‘미(迷)했다’는 것입니다. 본래 맑고 깨끗한 물인데 바람이 일어남으로써 물결이 일어나니까 바다가 미(迷)했다, 즉 바다 본체를 잃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했다는 말은 한 생각이 일어났다는 말로서 한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에 미했다, 미했기 때문에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각(覺)’이라는 말은 일어난 한 생각의 당체가 본래 없다고 타파해 버린 것입니다. 일어난 망상의 자체는 동․서․남․북․상․하․고(古)․금(今)으로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일어나는 곳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각을 ‘상각(常覺)’이라 하는데 항상 각(覺)해 있기 때문에 백년 동안 단 한 생각도 안 일으키려면 안 일으키고, 하루 종일 생각을 일으키려면 일으키고 마음대로 한다 이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남을 자유자재로 하니까 부처님을 깨달은 왕, 즉 ‘각왕(覺王)’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자종녹야원(自從鹿野苑)으로 종지발제하(終至跋提河)히 어시이중간(於是二中間)에 미증설일자(未曾說一字)라” 즉 “녹야원(鹿野苑, 탄생지)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 열반하신 곳)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설법을 했어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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