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者의 一燈 -생각이 없는 無慾한 마음-_대담/丁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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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06-18 12:07 조회5,688회 댓글0건본문
정 훈 : 불교의 포교방법도 이젠 산중(山中) 불교에서 벗어나 보다 대중 속에 뛰어드는 적극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볼 때 최근 몇 년 간 신도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교세도 커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아직도 구태의연한 산중불교라는 포교방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스 님 : 참 좋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실력이 배양되어야겠지요 그런데 현재 자기가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상태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출할 수 있겠어요. 최근의 우리 한국의 불교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정 훈 : 종단 얘기는 그만하고 스님께서 완역, 출간하신『화엄경』얘기좀 해 주십시오. 신문지상에는 여러 번 소개된 것 같으나 법륜(法輪)지 독자들을 위해서도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 님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설산(雪山)에서 6년간의 고행 끝에 터득한 진리를 21일 동안 제자들에게 강론한 경전의 최고학설로, 요즘 말로 비유하자면 대학원격의 학설입니다. 좀더 풀이하자면 유치원격은 아함경(阿含經), 중학교격은 방등경(方等經), 고등학교격은 반야경(般若經), 대학교격은 법화경(法華經)이지요. 이를 합쳐 만든 것이 팔만대장경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펴낸『신화엄경합론』은 이통현장자의『화엄론』40권에다 청량징관의『소초(疏鈔)』까지 곁들여 화엄학을 집대성했다고나 할까요.
정 훈 :『화엄경』이 그만큼 위대한 경전인데 그간 국역(國譯)을 시도한 사람들이 없었나요.
스 님 :『화엄경』은 원래 난해하고 뜻이 깊어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법할 때도 처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화엄경』은 중국으로 건너가 한문으로 번역되고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었습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심취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강론했지요. 그 뒤로도 수많은 고승대덕들이『화엄경』을 강의 또는 번역을 시도했으나 워낙 분량이 방대하고 뜻이 깊어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정 훈 : 금년 들어서는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나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에서도, 대학가에서도……. 스님께서 보시는 바람직한 지도자상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스 님 : 유교를 보면 지도자의 지침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대학』의 삼강령(三綱領: 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팔조목(八條目: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중에 치지(致知)의 ‘지(知)’가 그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즉 망상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본래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지도자는 바로 이 같은 범주에 드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지(知)는 바로 덕(德), 도(道), 진리(眞理)와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정 훈 : 끝으로 불자들은 물론이지만 일반인들을 위해서 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 님 : 생각이 없는 대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너무나 광범하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늙지 않았습니다. 외감(外感) 내상(內傷)으로 사람은 늙는다고 하지요. 외감이란 풍한서습(風寒暑濕), 내상이란 소위 7정(七情)으로 희로비사우경공(喜怒悲邪憂驚恐)입니다. 속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타파하신 것은 다른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심(生滅心)이 본래 끊어진 자리를 본뜬 것입니다. 이를 과덕(果德)이라고 하는데 바로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닦을 때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아 얻은 이 과덕을 가지고 씨앗으로 삼는 것입니다. 만일 과덕 밖의 다른 것으로 씨앗을 삼는다면 바로 미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과(果)가 없는 인(因)이 없고, 인(因)이 없는 과(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초목이 먼저 인(因=꽃)이 있고 뒤에 과(果=열매)가 있지만 오직 연꽃만은 꽃 속에 열매가 있어 인과가 동시에 있지요. 따라서 부처님이 성불(成佛)한 과덕과 중생의 망상이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마음의 생멸(生滅)을 찾아보면 본래 일어나는 곳이 없는데, 일어나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에 중생들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 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법륜』1980년 5월호.「부처님 오신 날 특별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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