妙理比丘尼法喜禪師塔碑 小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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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7-31 16:43 조회7,303회 댓글0건본문
檀紀四二二○年 丁亥二月九日에 師生於忠南公州郡灘川面新基里하니 兪氏昌周之二女也라 纔四歲에 其外祖母負背하고 入鷄龍山東鶴寺彌陀庵하야 出家하니 時는 庚寅三月九日也러라 十四歲時에 從貴完尼師削髮하고 依東雲和尙하야 受沙彌尼戒하다 二十三歲에 入海印寺하야 受具足戒하고 再入東鶴寺萬愚會下하야 修了經典語錄等하야 至二十五歲에 往德崇山見性庵入榜하야 修禪中에 心眼이 忽開하니 滿空和尙이 贊之하고 以法喜之號로 贈之하시다 一日에 和尙이 擧迦葉刹竿話하야 告衆曰 汝等은 試道看하라 尼師 出衆告和尙云호대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다 又一日에 擧龍雲法師의 雪裏桃花片片飛之句하야 告衆曰 飛在甚麽處오 尼師出衆曰 雪消하니 一片地로소이다 和尙이 云只得一片地라하시니 自此以後로 住錫于四佛山潤筆庵과 智異山九層庵과 漢城貞陵洞仁修齊와 德山報德寺와 千聖山 內院寺와 三角山 僧伽寺 等地하야 自行化他에 隨緣度日하야 攝心慮以恬愉하고 憩閒林而自適하야 末後七十餘歲에 更入修德寺比丘尼叢林하야 任院長之職而大振禪風하야 逍遙度日이라가 丁巳三月九日에 奄然入寂하니 世壽는 八十九요 法臘은 八十五也니라 考其一生컨대 幽磵으로도 未足比其淸이요 飛雪로도 無以方其素라 前乎百載之旣往과 後乎百載之方來니 未有如此之盛事者也로다 其門徒相輪宗玄靑空等이 囑余爲文하야 以圖不朽어늘 余不敢以不文而牢讓故로 略敍顚末如右하노라 如上所說은 盖在摭實而已요 枝葉華藻는 無所務焉이로다
應化 三千六年 己未 仲秋節
五臺山人 呑虛 金鐸聲 撰幷書
【번역】
스님은 단기 4220년(1887) 정해 2월 9일에 충남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유창주의 둘째 딸이다. 스님의 나이 겨우 4살이 되었을 적에 그의 외조모가 등에 업고서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데리고 들어가 출가시키니, 때는 경인년 3월 9일이었다. 14세에 귀완 비구니에게 삭발하고 동운스님에게 귀의하여 사미니계를 받았으며, 23세에 해인사에 들어가 구족계를 받고, 다시 동학사 만우(萬愚) 회하(會下)에 들어가 경전과 어록 등을 배웠고, 25세에 덕숭산 견성암에 들어가 방을 붙이고 참선을 하던 중에 마음과 눈이 문득 열렸다. 만공스님이 그를 칭찬하고 법희(法喜)라는 법호를 내려주었다.
하루는 만공스님이 ‘가섭의 찰간(刹竿)’ 화두를 들어 대중에게 “너희들이 한 번 일러보라.” 하자,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고기가 헤엄치니 물이 혼탁하고, 새가 나니 깃이 떨어집니다.”
또 하루는 용운(龍雲) 법사의 ‘흰눈 속에 복사꽃이 어지러이 난다’는 구절을 들어 대중에게 “날아가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물으니,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눈이 녹으니 한 조각 땅입니다.”
이에 만공스님이 “한 조각 땅일 뿐이다.”고 말하였다. 그 후로부터 사불산 윤필암, 지리산 구층암, 서울 정릉 인수재와 덕산 보덕사와 천성산 내원사와 삼각산 승가사 등 여러 곳에 주석하시면서 자기 수행과 중생교화로 인연 따라 세월이 흘렀으며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어 즐겼고 한가로이 푸른 산 숲에서 천만 가지 반연을 쉬며 스스로 편안히 하셨다. 70여 노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수덕사 비구니 총림으로 들어가 원장을 맡아 선풍을 크게 떨치다가 정사년(1977) 3월 9일에 열반하니 세수는 89세요, 법랍은 85세이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큰 시냇물로도 그의 청백함을 비유할 수 없고, 하얀 눈으로도 그의 소박함을 비유할 수 없다. 앞으로 백세의 과거와 이후로 백세의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성대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문도인 상륜, 종현, 청공 등이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도모하기에, 나는 문장이 능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위와 같이 전말을 서술하는 바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는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요, 지엽과 화려한 문장에 힘쓴 바 없다.
불기 3006년(1979) 기미 중추절
오대산인 탄허 김택성은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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