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이 없는 정진(精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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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10-20 17:37 조회7,364회 댓글0건본문
머무름이 없는 精進
부처님 말씀에 중생은 모두 성불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중생 모두가 불성을 본래 갖추(本具)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중생(一切衆生, 모든 중생이) 실유불성(悉有佛性,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이란 곧 그러한 소식이다. 또한 중생심은 다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중생의 본래 마음이 불성의 자리에 있다면 그 불성이 청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이 이와 같이 평등하게 성불과 해탈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가능성 그대로만으로는 부처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문제가 있다. 본래 청정한 그 자리를 청정한 그대로 나타내자면 또, 그 청정성이 뚜렷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흔히 우리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다. 거울은 본래 맑고 깨끗하다. 맑고 깨끗하기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다. 이것이 거울의 본질이다. 우리의 마음도 이 거울 같아서 본래 깨끗하고 맑으며 그리하여 우주의 일체가 여기 그대로 비춰지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에 더러움이 묻었을 때, 거울은 거울로써의 구실과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더러움으로 물든 거울 앞에서는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다. 비춰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도 마찬가지로써 세상의 오염으로 물든 마음에는 아무런 반조(反照)가 없다. 청정한 그 본래심이 빛을 잃는다.
혹자는 육조혜능의 말씀을 빌어, 본래 거울도 없는데 때가 낄 마음이 어디 있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를 두고 한 말로써 청정한 그 마음자리를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이야기다. 육조스님 역시 오랫동안 피나는 용맹정진이 있은 뒤에야 그러한 자리를 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업장이 두텁고 근기가 얕은 우리 중생은 마음에 낀 때를 벗어버려야 한다. 물론 우리도 그것만 벗고 보면 거울도 때도 없는 경지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이 마음의 때를 벗기고 씻어 내는 일을 수행이라 하고 공부라 한다. 수행이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항상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것이 곧 정진(精進)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성불하려고 노력하는 보살의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닦는데 용맹스럽게 정진해야 하고, 해탈을 이루는 데는 불퇴전(不退轉)의 힘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 내야 한다.
그러나 성불로 향하는 길의 정진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과 같이 지극히 귀한 기쁨을 얻는 길에는 반드시 장애가 있게 마련이다. 주위의 유혹과 안으로의 태만심 등이 바로 그것이다.
『기신론』에 보면 수행하는 데는 인욕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인욕은 모든 장애를 참고 견디는 힘이다. 인욕이 없이는 정진을 계속할 수 없고 또 목적하는 성불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의 인문(忍門)에서는 이쇠훼예(利衰毁譽, 이익․손실․비방․칭찬) 등의 여덟 가지 바람(八風)에 동요하지 말아야 하며 겁내는 마음, 연약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또『기신론』에서는 중심을 잃은 자에게는 사마제귀(邪魔諸鬼, 삿된 마구니와 귀신)의 뇌란(惱亂)과 세간적인 갖가지 일에 끄달리게 되며 병고(病苦) 등의 장애가 따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겁약심을 내거나, 조바심을 내거나, 나태심을 내거나, 게으른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또한 산란한 마음으로 번거로움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이러한 굳센 정진이 계속될 때 우리가 목적하는 해탈의 길이 트일 것이다. 머무름이 없는 정진으로 본래 청정한 불성을 찾아 원만한 인생을 사는 것이 불교의 참다운 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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