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의 세계_3. 청량소(淸凉疏)와 통현론(通玄論=華嚴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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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9-26 09:18 조회9,911회 댓글0건본문
3. 청량소(淸凉疏)와 통현론(通玄論=華嚴論)
이에 대하여 청량국사는 세 가지 부차(復次, 순서)를 세워서 설명했다.
제일부차(第一復次)에서는 생생(生生)이 자유(自由)라, 중생과 중생이 스스로 다 갖추어 있다 하는 것이고, 제이부차(第二復次)에서는 타과(他果)가 재아(在我)라, 다른 사람의 과덕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고, 제삼부차(第三復次)에서는 당과(當果)가 재아(在我)라, 당래(當來)에 내가 성불할 과덕이 지금 나에게 있다. 이렇게 세 가지 부차(復次), 즉 단계를 밝힌 바 있다. 이것은 물론 훌륭한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은 모두 연기(緣起)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체적(本體的) 규명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통현(通玄)의『화엄론』의 대의는 무엇이었던가? 그 사구게(四句偈)를 살펴보자.
“불시중생심리불(佛是衆生心裡佛)
수자근감무이물(隨自根堪無異物)
욕지일체제불원(欲知一切諸佛源)
오자무명본시불(悟自無明本是佛)
부처란 바로 중생들의 마음 속의 부처이다(청량소의 삼부차 같은 어름한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근기의 감당함을 따를 뿐 다른 물건이 없다(즉 자기 근기가 감당해서 ‘옳소!’ 하면 그뿐이지 그것 밖에 다른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도리는 참선하는 사람이 아니면 믿지를 못한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모든 부처님, 즉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나의 무명, 즉 우글우글하는 번뇌망상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통현장자의『화엄론』40권의 대의인 것이다. 앞서 말한『청량소』의 세 가지 부차(復次, 3단계 논법)와 비교하여 본다면『청량소』의 삼부차는 종지(宗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연기를 면하지 못한다. 본체론이 못 된다. 그래서 역대 조사들이『통현론』을 중시해 온 것이다.
각범(覺範) 선사는『임간록(林間錄)』에서 통현장자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호수사령심경공(虎受使令心境空)
여위반조증애기(女爲伴助憎愛棄)
지장조백천재발(只將棗柏薦齋鉢)
아래염부비착미(我來閻浮非着味)
호랑이를 마음대로 부리니 마음경계가 공했기 때문이요
천녀의 도움을 받으니 미움과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
다만 대추와 잣 잎으로 공양한 것은
내가 이 사바세계에 온 뜻이 맛에 집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 말은 통현장자의 인품을 찬탄한 것이고 40권『화엄론』을 찬탄한 것은 이렇다.
“성현낙생범유중(聖賢酪生凡乳中)
지유관조정혜력(只由觀照定慧力)
이색공관입제경(以色空觀入諸境)
주도긍경무전우(走刀肯綮無全牛)
성현의 젖이 범부의 젖 가운데서 생겨나니
오직 정혜의 힘으로 관조하기 때문이다
색공관(色空觀)으로써 일체 경계에 들어가니
칼이 긍경을 달리매 온전한 소가 없더라.”
이렇게 각범선사가 칭찬하였다.
정말 아무리 읽어 봐도 권태가 나지 않는 글은『화엄론』이다. 재미가 있고 한 장만 읽어도『화엄경』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진다. 그러나『청량소』는 몇 장을 넘겨도『화엄경』이 어디에 가 붙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화엄론』을 다들 정독하기를 권하여 마지 않는다.
주)
* 위의『임간록』의 글은 앞과 뒤, 그리고 중간에 몇 줄이 더 있다. 스님께서 단장취의(斷章取義) 하신 듯하여 그대로 둔다. 다음 페이지의 시구도 역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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