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者의 一燈 -생각이 없는 無慾한 마음-_대담/丁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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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06-11 16:48 조회5,792회 댓글0건본문
정 훈 : 오늘은 부처님 오신날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에는 연등을 켜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지요?
스 님 : 원래 연등을 켜는 것은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기 위한 하나의 의식(儀式)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연등을 많이 켜는 것은 광명을 더 많이 얻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되겠죠.
그러나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부처님께서 어느 마을에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돈 많은 사람들의 등은 크고 호화스러웠지만 돈이 없던 어느 할머니의 등은 작았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큰바람이 불어서 모든 사람들의 등은 모조리 꺼졌으나 신기하게도 가난한 할머니의 등만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어째서 할머니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 것입니까?”고.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한 마디로 정성으로 마련된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성의의 초점은 등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고 설파하셨지요.
정 훈 : 부처님의 제자이신 가섭존자에 관한 얘기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잖습니까?
스 님 : 가섭존자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가섭존자께서는 우연히 가난한 노파가 홀로 살고 있는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그 노파는 가섭존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섭존자를 위해 이웃집에서 보리쌀 뜬물을 얻어다 끓여 가섭존자에게 공양했습니다. 가섭존자는 그 할머니의 정성이 가상하여 할머니에게 “소원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가섭존자에게 “천당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가섭존자는 할머니에게 “그대는 이 인연으로 삼선천(三禪天: 28천당 중 가장 높은 곳)에 가게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시(布施: 깨끗한 마음으로 법이나 물건을 사람에게 베풂)를 한 만큼 되돌아간다는 뜻이죠. 성의가 문제이지 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 훈 : 조계종단의 분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벌써 3년째 계속되고 있는 종단의 분규에 대해 불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이젠 불교 하면 싸움만 하는 교단”으로 알고 있을 정도이니까요. 최근 화합의 기운도 싹트고 있지만 화합했다가도 금방 깨지는 것이 조계종인지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처방전이 없을까요?
스 님 : 불교에 몸담고 있는 저로서도 부끄럽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모든 분규의 원인이 권력과 명예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도(道)를 닦는 승려들에게 무슨 놈의 권력과 명예가 필요하겠습니까.『장자』에 보면 허유(許由)와 소부(巢父)의 유명한 얘기가 있어요.
요(堯)임금이 허유가 현인(賢人)이라는 소식을 듣고 허유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허유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도리어 자기의 귀가 더러워졌다고 하여 영천(潁川)의 물에 귀를 씻었습니다. 마침 친구인 소부가 기르는 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소를 몰고 왔다가 친구인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서 물었습니다. “아니 왜 귀를 씻고 있는가?” 허유가 말했지요. “요임금이 나에게 왕의 자리를 맡으라고 하길래 더러워서 귀를 씻네.” 그러자 소부 역시 “그 더러운 물을 어찌 소에게 마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소를 끌고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허유는 이것이 매우 부끄러워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버렸어요.
허유와 소부의 얘기는 수백 권의 책자보다 더 큰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고 있습니다. 좀더 부연한다면 지상의 목표가 이 우주 밖의 문제인 도(道)에 있다면 이 같은 싸움은 자연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종단에서 종권(宗權)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지상 목표는 권력과 명예이니 분규가 해소될 리 있겠어요…….
『장자(莊子)』를 한 마디만 더 인용할까요.『장자』에 보면 돼지에 관한 우화가 있어요. 인간과 돼지가 문답을 나눈 것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돼지 너를 석 달 동안 잘 먹이고 살이 찌게 한 다음 오색찬란한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죽여 천제를 모실텐데, 이 때 천자는 물론 모든 문무백관들이 너에게 국궁재배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좋지 않느냐?”
돼지가 말했습니다.
“나는 죽고 없는데 천하가 나를 우러러본들 무엇하겠소. 그냥 이 더러운 우리 속에서 음식 찌꺼기를 먹고 살더라도 살아 있는 것이 더 좋소.”
이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입니까?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든지 구성비를 보면 극히 선량한 사람이 20%쯤 되고, 극히 악한 사람이 역시 20% 정도입니다. 나머지 60%는 그저 일반 대중들입니다. 가령 선량한 사람이 정권을 잡을 경우 모든 요소요소에 선량한 사람이 등용되지만, 악한 사람이 정권을 잡을 경우 선량한 사람이 발을 붙일 곳이 없어집니다.
정확한 비유는 못 되지만 율곡선생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시대에 가서 인재(人才)를 빌려오지 않는다.”
이 말은 인재는 그 시대 시대에 있기 마련이라는 뜻인데 지금 종단의 형편이 인재의 출현을 막고 있는거나 마찬가지 상태에 있어요. 즉 인재들이 나서기를 꺼려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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